강가, 갠지스에서 맞는일출
새벽, 꽃을 띄우다.
바라나시에서 두 번째로 묵었던 새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여행객을 위한 서비스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와 같은 간단한 한국말도 배워 써먹을 줄 알았고, 새벽 일출을 보는 보트 투어도 무료로 제공했다. 게으르게 지내고 있던 날들이라 새벽 기상이 영 탐탁지 않았지만, 무료 서비스라면 그냥 지나칠 순 없으니. 그리고 바라나시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을 것 같았다.
새벽 투어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잠을 설쳤다. 6시 5분 전. 눈곱만 떼고 나서니 젊은 한국 여자분 하나가 벌써 조용히 로비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전날 밤에 우연히 함께 방을 쓰게 된 명랑한 동행도 함께했다. 이 쾌활한 아가씨는 만난 지 30분 만에 자신의 가정사를 아무렇지 않은 듯 풀어놓는가 하면, 다른 한쪽의 아가씨는 말 수가 별로 없는 듯 수줍다. 그나마 조금이나마 건네준 정보에 의하면 네팔 히말라야 등반을 마친 후 며칠 전 인도로 들어왔다고 했다. 서른셋의 나이지만, 얌전한 양반집 할머니 같은 진중한 그녀의 모습은 보통의 젊은이들과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처음 만난 서로 다른 세대와 성격의 세 여성이, 갠지스강의 새벽 배를 함께 타게 되었다. 어린 소년을 따라 강가로 내려가는 어둑한 골목길은 랜턴이 없이는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캄캄한 새벽이었지만,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곧 감지되었다. 물을 길어가는, 장작을 실어가는 사람들, 자전거와 릭샤, 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 기도하는 자들. 아직 빛이 없는 세상인데도 바쁘게 흘러가는 그림자는 분명했다. 어두운 밤과 새벽이 이어지는 빛이 없으나 계속되고 있던 풍경을 떠나기 전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보트에 오르다 보니, 내려가는 길까지만 안내하는 역할일 줄 알았던 10대의 꼬맹이가 오늘 우리의 뱃사공, 왈라였다. 들떠있는 이십 대 명랑 아가씨는 일출을 태어나 처음 본다고 했다. 삼십 대의 과묵한 아가씨는 어디론가 멀리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사십 대에 막 접어든 나는 어리고 젊은 그녀들과 마주하니, 내가 지나온 그들 나이의 시간을 되감고 있었다.
점점 한쪽 하늘이 밝은 기운으로 번진다. 우리가 탄 작은 배가 반환점을 돌 때쯤, 꽃초(dia)를 파는 소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인도에 끌려 정착한 어느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에피소드를 읽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곳에서, 함께하고 싶던 여인을 위해 천 개의 꽃초를 띄우고 그녀에게 프러포즈했단다. 일출을 보러 나온 우리였지만, 그래도 기념할만한 각자의 이벤트를 위해 갠지스강에 소원을 비는 꽃초를 띄워보기로 했다. 외국인들의 배에 올라 꽃 쟁반을 들고 장사 중인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손짓해 부르니, 배가 다가가 그녀를 태웠다. 아이들은 새벽부터 메뚜기처럼 이 배 저 배 옮겨 다니며 꽃을 판다. 새벽부터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하다. 종지만 한 은박접시에 꽃잎들과 심지가 꽂힌 5루피, 약 100원짜리 꽃초를 하나씩 받아 들고 긴장했다. 새벽 찬바람에 불씨가 사그라들까 염려스러웠을 거다. 작은 심지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고이고이 정성스럽게 두 손 모아 강물에 띄웠다. 깊고 검은 물살에 가라앉기라도 할까, 뒤집히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하는 모습은 누구나 같았다. 꽃불 하나 가라앉는다고 내가 띄운 소망이 엎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이 넓고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큰 강물 위에 그야말로 소소한 불씨 하나 띄워놓고는 모두가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작은 불씨에 태워 보내려는 각자의 마음들이 궁금했다.
어느새 말간 해가 이쁘게 떠올라 환하게 세상이 밝았고, 새들도 날아들었다. 여전히 매일의 일상처럼 누군가는 저 멀리서 태워지고, 강물이 되고 있었고, 그새 각자의 바람을 띄운 작은 꽃배들은 어두운 강물 속으로 사라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처음 본 일출도 갓 스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 가보았던 동아리 MT는 강릉의 어느 바닷가였다. 밤을 꼴딱 새워 기다리다, 해변에서 폴짝거렸던 스무 살의 시간이 아직 생생하다. 그리고 지나온 서른셋의 시절엔, 무언가 해보겠다고 애쓰면서 밤을 새우고는 뜨는 해를 바라보며 쓰러지듯 몽롱한 채 새벽을 맞았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막 40대에 접어든 즈음, 오늘의 새로운 태양으로 세상이 바뀔 것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여전히 경이롭고 두근거리는 순간인 것이 신기하다. 강릉의 바닷가나 갠지스강이나, 새해 첫날이나 아무 날이나, 같은 태양을 만나는 일인데도 새로운 공간에서 다른 기억으로 촘촘히 박히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일출(日出)’이라 명명한 그 순간, 어쩌면 우리는 빛과 색이 변하는 현상만으로도 환호하곤 하지만, 어쩌면 매일 새롭고, 매일 계속되는 자연의 에너지에 기대고픈 마음들이 모아진 박수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이 어제와 다른 하루일 것이라 믿고 싶고, 점치고 싶은 소망이 뭉글거리는 시간이다. 새벽의 이 시간을 꽤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그저 일출을 보러 나온 우리는 꽃차를 하나씩 받아 들고 긴장했다. 새벽 찬바람에 불씨가 사그라들까 염려스러웠다. 작은 심지 하나에 붙은 불이 꺼질까 고이고이 정성스럽게 두 손 모아 강물에 띄웠다. 물살에 가라앉기라도 할까, 가라앉는다고 내가 띄운 소망이 엎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이 넓고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큰 강물 위에 그야말로 소소한 불씨 하나 띄워놓고 꽃과 함께 마음을 태워 보냈다. 그리고 저 멀리서 해가 떴다. 새들도 날라들고, 강바람을 맞으며 또 누군가는 저 멀리서 태워지고, 강으로 흘러, 강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