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드 뿌르(Jodpur)에서 김종욱 찾기
파란 도시, 조드푸르로 빠진 날
중부 내륙의 옛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에서 200km만 올라가면 뉴델리, 인도의 현재 수도로 연결된다. 짧은 여행경로를 계획한다면 보통 뉴델리-아그라-바라나시 만을 훑고 가는 경우도 많은데, 나에겐 서쪽의 ‘라자스탄(Rajasthan)’ 지방까지 조금 더 탐험해볼 여유가 있었다. 함께 가던 샘과도 이제는 안녕.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 많이 의지했던 그녀는 아그라에 좀 더 머물다 뉴델리로 올라간다고 했다.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나는 또 밤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움직였다.
라자스탄주로 초점을 맞춰보니, 색다른 도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방은 가장 면적이 넓은 주이면서 힌두교 특히 옛 문화의 영향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곳이라 했다. 더 서쪽으로는 파키스탄과 만난다. 파키스탄과는 아직도 영토분쟁을 할 정도로 조금은 거친 도시의 느낌이 있다. 라자스탄에는 여러 특색 있는 도시들이 있지만,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자이살메르라는 사막 도시, 핑크빛 도시라는 자이푸르도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조드푸르와 우다이푸르를 선택했다. 가이드 북에서 본, 조드푸르의 색감은 환상적이었다. 예전에 본 뮤지컬을 리메이크한 영화 <김종욱 찾기>도 조금은 이유가 되었다. 영화 속 '첫사랑 찾기' 이야기와 인도 곳곳의 싱그러운 장면들은 '조드푸르'라는 이 도시를 빼고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단지 그 푸른 도시의 색감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목표 하나로 아그라-조드푸르-우다이푸르라는 조금은 더 먼 (돌아가는) 경로를 선택하게 되었다.
조드푸르행 완행열차를 기다리며 아그라의 떠들썩했던 분위기와 동행들과 헤어져 다시 혼자가 되니 갑자기 조금은 외로워졌지만, 마치 옛 도시에 묻힌 무언가를 발굴하러 가는 그것처럼 기대에 들뜬 채로 침대칸 열차에 올랐다. 늦은 밤 아그라에서 출발한 기차는 어스름한 새벽, 조드푸르 역에 정차했다. 작은 도시였기에 지나치면 낭패여서 역시 새벽잠을 설치며 정차역에 무사히 내리려 긴장했다. 여행 카페나 론리플래닛에 표기된 유명한 숙소를 무작정 찾아 나서며 기차에서 내린 여행자들과 함께 릭샤를 잡아탔다. 평이 좋고 저렴한 인기 숙소는 당연히 방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지만, 홀로 여행객들에겐 보너스처럼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다. 오늘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너무 이른 새벽에 도착해서 주인장들이 잠을 깨고 일상을 시작하기까지 약간의 기다림이 있었지만, 운 좋게도 옥탑방 1인실을 저렴하게 (120루피!) 얻는 행운을 갖게 된 것!. 소박하지만 전망 좋은 숙소에서 (오늘도 역시) 짜이 한 주전자(pot)를 주문하는 기쁨의 의식과 함께 조드푸르에서의 하루 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드푸르는 <메헤랑가르>라 불리는 성채가 마을 위쪽에 자리하고, 관광지라고는 마을의 전망을 볼 수 있는 몇몇 포인트와 시장, 그 중심의 시계탑 광장 등등이 전부였다. 아, 가끔 '김종욱 찾기'의 촬영지였다는 광고로 손님들을 유혹하는 기념품 가게와 식당들이 눈에 들어오는, 작은 마을이다.
역시 이 도시의 매력은 푸른빛이었다. 파랑의 다양함을 실험이라도 하듯, 채도와 명도가 다른 각종 푸른색의 빛깔 차트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온몸으로 푸른색 안에서 살아있는 인도의 '색채'는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숙소에 가방을 던져두고 아침을 해결한 뒤, 동네 곳곳의 파란색을 (렌즈로) 채집하러 나섰다. 초록에 가까운 박하부터 보랏빛에 가까운 바이올렛 블루까지, 조드푸르 시내 집집이 온종일 뒤지다 보면, 아마 세상에 있는 파랑의 종류를 다 채집한 컬러 팔레트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과거 힌두의 여러 신 중 시바를 상징하는 푸른색,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브라만 사제들이 사용하던 이 푸른 물감은 귀한 것이었기에, 카스트 제도가 엄격할 당시 그 계급만 사용할 수 있던 비싼 푸른색이 계급구조가 허술해지면서 확산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블루 시티'라는 조드푸르의 개성을 이어가려는 의지로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듯했다. 왠지 그리스의 산토리니나 모로코의 샤프 샤오엔 같은 도시의 푸른색에서 느껴지는 찬란한 파랑보다도 좀 더 처연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계급사회의 이면이 녹아있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푸른빛에 홀려 골목을 다니다 보니, <김종욱 찾기>의 그 집이라며 호객용의 포스터를 붙여놓은 가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우다이푸르에 있던 어느 골목의 바닥에는 “종욱아 대체 어디 있는 거니!!”라는 낙서도 있었다.
...
"그래서, <김종욱>은 찾으셨어요? “
...
조드푸르를 거쳐왔다고 말하면, 여행 중 만나는 한국 여행자들끼리 흔히 나누는 인사였다. 여행이라는 결정적 도피 행위를 멜로에 얹어낸 제법 탄탄한 러브스토리는 젊은 청춘들을 홀려내기에 적당했다. 평상시엔 몹시도 '이성의 작용'을 중시하는 '이과형'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김종욱 찾기> 속의 주인공들에게 감정이 이입되면서 마음이 풀어지고 솔깃하게 했었다. 나 역시 겨우 하룻밤. 그것도 파란 도시의 이미지가 궁금해서 이 도시에 머물게 된 것만은 아닐 거다. 유적을 발굴하듯 새로운 도시를 만나겠다는 이면에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찾고 싶은 모종의 멜로를 기대하지 않은 여행자가 있을까. 그렇게 다들 <김종욱 찾기>에 기대어 특별한 무엇을 찾아 헤매는 듯 눈동자의 초점이 어디엔가 먼 지점을 향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면, 굳이 극 중 여주인공인 임수정의 직업이, 평소 동경하던 '무대미술 감독'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상큼한 20대의 모습으로 빛나는 그 배우에게 공연히 이입하고픈 욕심도 있었음을 고백해본다. 기억조차 희미한 옛사람들에 대한 추억 보따리에 몽글거리고 싶은 감정 놀이를 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만의 옛 영화 필름을 다시 돌려보며 나만의 추억 찾기를 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햇살이 빛나 푸른빛이 더욱 푸르던 아침, 그렇게 홀로 블루 시티의 골목을 걸으며 꽤 여러 단계의 타임 슬립에 빠지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 푸른 도시에 홀린 다른 청춘들도 그들만의 멜로의 마법에 빠졌을 거다. 인연일까 두려워 접어두었던, 혹은 인연이 아닐까 두렵던 마음들을 '누군가'가 찾아주기를, 어쩌면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기대어 보는 일. 게다가 이런 종류의 슬픈 하늘빛 블루 시티의 판타지라면, 하루쯤은 그 판타지에 녹아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날이었다. 색감과 볕이 좋은 푸른 도시에서 그렇게 한참을 둥둥 떠다니듯 <그>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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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종욱 찾기>의 감독 장유정은 뮤지컬 <김종욱 찾기>의 연출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술에 취해 떡이 된 남자를 보며 ‘저 사람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순간 본인의 인도 여행 당시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잘생긴 남자가 떠올라 이야기를 만들게 되었다고...
*출처 : 한국 콘텐츠진흥원 / http://koreancontent.kr/1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