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젹 Jun 18. 2024

Avril En France

운수좋은날_3

Avril 19, 2024

카페에 앉아 있기를 2시간째, 너는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내리던 비는 물러난 것으로 보였다. 카페에서 나오는 미국 음악들이 슬슬 너의 신경을 긁을 때쯤, 너는 다시금 지도를 폈다가 프랑수아 트뤼포의 묘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시간은 6시 언저리, 저녁식사가 7시 30분이었으므로 시간은 충분했다. 너는 활기차게 걷기 시작한다, 묘지가 이미 닫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묘지에 도착한 너의 눈에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을지 모르지만 잠깐이었을 테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 것도 아니었으니까.


"작사가인 Pierre Jacob이 1939년에서 1979년까지 살았던 집. Rue Lepic의 표지판, 그 아래에 "엘리트들 중에 X같은 것들이 너무 많아" 격의 낙서

계란 노른자가 깨졌으니 스크램블을 만들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너는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몽마르트 묘지에서 사크레쾨르(Sacré coeur는 성스러운 심장을 뜻한다. 성심당 처럼.) 성당까지 오르는 길은 네가 처음 몽마르트 언덕을 올랐을 때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유명한 이들이 살았던 곳들에 현판이 달려 있었고, 너는 그중 이곳에 살았던 Pierre JACOB이라는 사람이 썼다는 "Rue Lepic"이라는 노래에 흥미가 생겼다. 노래를 듣던 너는 네가 걷던 거리가 노래의 제목인 Rue Lepic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흥이 더해진다. (노래 링크: https://youtu.be/PrQT2p6urQI?si=U7OAIZhIPI7bM4qH)


너의 몽마르트와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파리. 변치 않는다는 것의 즐거움.

언덕을 오르는 길, 밑 칠을 한 캔버스 같은 거리와 같은 색의 하늘이 너를 둘러싸고 있다. 도로는 내린 비로 젖어 있었고, 사람은 많지 않아 한적하다. 길가의 돌과 작은 사람들을 본다. 경사가 있는 도로에 아치 형태로 블록을 설치해 흘러내리지 않게 한 것이 신기했던 너는 한참을 바라본다. 스스로를 잘 믿지 않는 너는 계속 "내가 생각한 것이 맞나, 아닐 수도 있겠지"를 반복한다. 너의 한심한 생각들을 너는 자주 검열한다. 어릴 때 본 일본 영화 "사토라레"의 주인공처럼 사실은 너의 목소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다 들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공포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순간이다.


사크레쾨르 성당 앞에는 마라톤 행사를 위한 가림막이 쳐져 있었고,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성당 앞에는 가방 검사를 하는 보안요원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꼭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너는 비를 피하고 싶었다. 운 좋게도 성당은 미사 중이었다. 너는 공간을 듣는다. 성가와 사제의 목소리가 작은 신의 세계를 채운다. 관광객들 중 카톨릭 신자들은 예를 표하며 들어가고 너는 동양인답게 괜히 머리를 한 번 끄덕여본다.

앱스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온 너의 눈앞에 어쩔 바를 모르는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 있었고,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약속시간이 임박한 너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고, 무작정 내려가다 인도인 억양을 가진 사람에게 7유로를 주고 우산을 산다. 그의 일행이 10유로에 팔려고 수작을 부렸지만 "얘가 7유로라 그랬는데?" 정도의 불어는 할 줄 아는 너여서 5000원가량을 아꼈다.

독일인 커플의 사진을 찍어주고 내려오는 길 청둥오리 한 쌍을 본다. 네게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외로움이 치밀어 오르지는 않았지만 서둘리 내려가다 사진을 찍게 된 너의 무의식은 속일 수 없다. 파리 한 복판에서 "황조가"를 떠올리게 될 줄은 너도 몰랐다.


너의 남은 하루는 다행히 식당에 잘 도착하고, 같은 작품을 했던 제작사 대표님인 N과 저녁식사를 하고 촉촉한 거리 위 택시에 실려 숙소로 간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피곤했지만 너는 침대에 앉아 여행기를 썼다. 그리고 뒤이어 올 한국인 여행자를 위해 조르주 페렉의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한국어판과 한국에서 가져간 예쁜 엽서를 책상 위에 두고, 미래의 한국 여행자에게 한 편, 팔미나 할미에게 한 편의 편지를 썼다.


파리에서의 마지막날이 이렇게 흘러갔다. 의도치 않게 많은 곳을 가게 된 날이었다. 사람은 늘 자신을 어딘가에 위치시키며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와 그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이 하루를 다시 돌아보면서 느끼게 된다. 짤막한 스토리들이 모여 하나의 서사가 된 하루를 살았었다.


덧. N과의 저녁 식사 후 남긴 글

19_Avril_2024_2

N과의 저녁

후배로서, 동료로서 나를 대해주는 어른은 참 ‘귀하다'. 나의 가치를 근거 있게 넓게 평가해 주고 내 고심을 인정해 주는 그런 어른. 밥 잘 사주는 멋진 형을 만났다. '내가 실수한 건 없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만남들, 그런 행복한 만남들을 이곳 파리에서 하고 있다. 앙트레부터 데세르까지의 식사가 처음인데, 혼자 여행을 다니며 부러워했던 ‘창 안의 풍경’ 속에 내가 있어서 좋았다.

작가의 이전글 Avril En Franc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