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상 화가의 생존 신고
놀이기구를 탄 듯, 정신이 아득해지며 수직으로 하강하는 기분. 그런 스릴을 제법 즐기는 편이지만, 놀이공원 밖에서 느끼는 걸 원했던 적은 없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채용 사기와 사랑둥이 막내 고양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화창한 봄날 내내 나를 지면 아래로 끌어당겼다. 마치 지구의 내핵을 향해 상승각 없이 내리 꽂히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랄까.
그럼에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지난날 키운 내성과 순발력 덕분에 본능적으로 최선의 조처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새롭게 입은 내상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장수말벌의 본진까지 초토화하는 벌매가 아무리 봉독에 내성이 있다 해도, 침에는 물리적 따가움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오랜만에 마주한 무력감과 짙은 슬픔의 터널을 지나며, 아직은 보이지 않는 한 줄기 빛을 찾아 헤맨다.
겨우내 붙잡고 있던 원고가 내열을 식히는 아이스팩 역할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매진해야 할 집필 일정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졌을 것이다.
의지와는 다르게 순간순간 무력해지는 일상을 지나면서도, 억지로 술래가 되어 얼음이 된 몸에 ‘땡!’을 외친다.
‘땡.’
움직이지 않는다.
‘땡!’
오, 얼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밖으로 소리 내볼까?
“땡.”
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군. 냅다 뛰자!
“땡!”
아, 이쪽이 아니었군. 다시 저쪽으로 가보자.
삶에 대한 강한 의지조차 무력화시키는 난관에 봉착하면, 누구나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든 ‘얼음’ 상태가 될 수 있다. 멈춘 순간부터 더욱 거세게 쏟아지는 불필요한 정보와 세상 잡다한 소리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벼웠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 된다.
가슴에 울화를 품은 채 굳어버린 얼음. 쥐도 새도 모르게 스스로 녹아 없어지기 전에 ‘땡’을 외치며 저벅저벅 걸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은 바로 그 ‘땡’을 외치는 법에 관한 것이다. 추상화를 그리고 글을 쓰다 멍석이 깔리면 신명 나는 가무도 마다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작가가 알려주는, 추상하며 생존하는 법. 그게 이 책의 핵심이다.
우리를 움직이고 멈추게 하는 스위치는 다름 아닌 우리 마음속에 존재한다. 과부하가 걸려 저절로 내려온 의식의 차단기를 찾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이 책이 작은 손전등이 되어 줄 것이다. 작지만 배터리도 오래가고 출력이 짱짱한, 그런 비상용 손전등 말이다. 전등뿐인가? 반대편에는 얼음에 균열을 낼 앙증맞은 망치도 달려있다.
어쩌다 마흔 언저리까지 살아남은 어느 추상 화가의 생존기 속엔 아름다운 것들만 담겨 있지 않지만, 그래도 유쾌하게 이 진흙탕 같은 전장을 헤쳐 온 실마리를 여러분들께 전해 드리려 한다.
사건의 본질, 나아가 나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고 다음 한 걸음을 내딛는 일. 그 단순한 패턴을 한번 익히고 나면, 다음에 다가올 셀프 빙하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진지하게 얼음땡 놀이 중인 꼬마 어른이 어떻게 땡을 외치는지, 놀이공원 밖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를 어떻게 놀이처럼 해결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려 드리려 한다.
각도가 심상치 않은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면, 지레 겁먹지 말자. 점점 더 선명하게,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추상 거울이 우리 앞에 있으니까.
게다가, 지금 막 손에 쥔 해머 랜턴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