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우리가 자신을 모르는 이유
“2~3년 정도, 정말 좋은 곳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면 어때요?”
생계를 위해 직장에 다니면서도 어떻게든 작품 활동을 병행해 보려 애쓰던 2021년께 한 선배 작가에게 들었던 조언이다. 작품이 좋으니 급하게 이력을 채우려 하지 말고, 몇 년 전시를 하지 않더라도 나를 알아봐 주는 곳과 연이 닿을 때까지 기다려 보라는 것이다.
그보다 몇 해 전 일로 뵈었던 한 유명 푸드 스타일리스트 또한, 내게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다. 지금이야 밥 먹듯이 밤을 새울 정도로 바쁘지만, 처음 시작하고 2~3년 동안은 의뢰가 한 건도 없어 집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기간 동안 자신을 믿어 주고 도와준 가족들 덕분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결국 당장 ‘먹고사는 일’ 때문에 내린 작은 결정들이 우리의 시야를 꽉 채워버리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매일 내리고 있는 선택의 기준은 아직도 온통 이 ‘먹고사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니 비워 둔 평일 이틀의 시간을 담보로 고정 수입 백만 원을 늘리는 선택, 막상 시간을 늘려 일해보니 생각만큼 현금 흐름이 녹록지 않아서 그보다는 안정적으로 대출을 일으킬 수 있는 정규직 일자리를 다시 알아보는 선택, 가장 먼저 처우가 조정된 곳으로 입사를 결정하는 선택 등, 어느 순간부터는 매일 확실한 숫자를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간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 년에 그림 몇 점을 팔아서는 작품 활동을 지속하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온 막연한 조급함은, 또다시 당장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얄팍한 선택으로 이어져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다.
작년 봄, 2년 만에 가진 개인전 준비에 거의 400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출했지만, 작품이 팔리지 않아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이 손실은, 앞서 선배 작가가 이야기한 ‘정말 좋은 곳’을 기다리지 못했던 데 대한 수업료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조급함이 밀려오는 순간에도 내가 살고자 하는 그 삶에 대한 확신이 선명해질 때까지 철저히 불확실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엔 이 강을 완전히 건너야 한다. ‘서울의 한강이 아닌 파리의 센 강이라면, 아니 베를린의 라인강이라면 좀 더 빨리 건널 수 있을 텐데’하는 헛된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활동 지역 탓도, 넉넉하지 않은 집안 탓도 아니다.
갈수록 현실이 모호해지고 있는 이유는, 누구도 아닌 내가, 모든 것이 선명해지기 전 일관된 시점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천천히 자라난 묵직한 확신이 마침내 선연히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지 못한 나의 호랑이 같은 성정 탓이다.
어쩌면 내가 애쓰며 기다리고 있는 기회란, 결국 ‘확신이 자라는 동안 마음껏 불확실할 기회’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불확실할 기회에 대하여 최종 결재를 내리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2~3년 동안 먹고사는 일’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후원자이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낼지에 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획자 말이다.
그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나 자신이다. 불확실함 속에서 확신을 길러내는 동안 먹고 살 걱정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둘 중 하나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 말인즉슨, 돈이든 신용이든 알뜰살뜰히 쌓아 작품에 온전히 집중하는 기간을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 작가들이나 작곡가들 대부분, 모은 돈을 아껴가며 활동하거나, 다른 일을 통해 쌓은 신용으로 자금을 융통하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작품 판매나 저작권료만으로 생계가 유지되는 안정궤도에 오르기까지는, 강의나 기업 협업 등 중간에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진행하면서 어쨌든 활동을 지속하려 다방면으로 애를 쓰는 것이다.
모든 프리랜서의 삶이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바람을 타지 못한 연처럼 고꾸라지는 시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게 마련이다. 일이 있을 때는 몰리고, 없을 때는 그야말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안정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이 10년, 20년씩 이어지면 지칠 수밖에 없다. 안정궤도에 접어든 이후에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어떻게 궤도에서 이탈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궤도 밖에서 햇빛도, 전기도, 아무 동력에도 닿지 않을 때 어떻게든 움직이려면, 자가발전밖에는 답이 없다.
예술가로서 기관이나 개인 후원처를 모색하기 이전, 가장 먼저 설득에 성공하고 후원을 받아야 할 첫 번째 대상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확신 없이 예술 활동을 지속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동력 상태에서도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이미 출발해 버린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을 방법은 하나이다. 확신도, 여유도,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아는 만큼, 딱 그만큼만 나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런데 큰일이다. 회사나 기관에 제출하기 위한 이력서나 작가 소개란에 쓸 구체적인 한 줄 한 줄이 늘어갈수록, 어쩐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모호해지는 느낌이 든다. 아니, 이제는 그 한 줄 한 줄이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마저 재단하기 시작한다. 열심히 발장구를 치고 있는데도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이 상태에 이르렀다면, 지금은 속도를 늦출 때다. ‘나는,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층층이 아우성치는 증거들을 모아 추상할 차례다. 지금의 나를 명확히 보기 위해, 잠시 구체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시간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