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우리가 자신을 모르는 이유
몇 해 전, 한 업계 관계자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추상을 하느냐고.
일종의 테스트인가 싶어 성의껏 대답했지만, 작가 섭외를 위해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는 것이 바로 드러났다.
“아, 제 취향은 구상이라서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분의 일관된 취향과 동료 작가들을 대하는 태도를 지켜보면서 오해는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응원하고 있는 20대 여성 작가의 작품을 구매한 것도 그 갤러리를 통해서였다.
그때 그분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은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상과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 방법이 무엇인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력 장르가 결정되는 것 같다.
예술에서, 특히 미술 분야에서 ‘추상’은 흔히 형태를 지닌 ‘구상’의 반대 개념으로 쓰인다.
‘추출하여 파악한다’는 추상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우리가 겪는 현상, 건물이나 컵 같은 물건, 또는 사랑과 같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 평화나 정의와 같은 커다란 개념들을 떠올리며 각각의 성질이나 공통점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추려내고 다른 것들은 생략하는 것이다.
즉,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이 바로 추상이다. 우리가 평소 상황이 애매모호할 때 ‘추상적이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는 사뭇 대조된다.
나의 경우, 형태가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때마다, 혹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원래 형체가 없는 경우 자연스럽게 추상 표현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고자 하는데,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랑의 표식인 ‘하트’만 덩그러니 그려 놓고 끝내기엔 아쉽다. 인물을 그려 넣고 사랑이 넘치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엄마와 자녀, 남자와 여자와 같이 인물과 상황을 통해 설명하면 사랑의 일부만 표현하게 되니 말이다.
그 고민을 하던 작업 초기. 점처럼 보이는 물감 덩어리들이 서로를 만나 합쳐지고, 더 큰 덩어리가 되고, 거기서 또다시 흩어져 커다란 꽃과 같은 형상으로 점점 확장하는 과정을 거치며 어느 한 시점에 그대로 굳도록 내버려 두었던 2011년 작품에 ‘사랑의 초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러스트레이션 석사 과정 중이었기에 교수진과의 마찰이 없진 않았지만, 결국은 ‘네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형식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지도해 준 학장 이안 노블 교수의 중재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황당무계하지만, 돌아보면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영국에서 독일로 넘어갈 기회가 생겼던 것도 그때 저질렀던 시도들 덕분이다. 일정이 겹쳐 졸업식 사진을 남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때가 아니면 언제 혈혈단신으로 독일 최북단 국경 지역에서 기관의 지원을 받으며 작업을 할 수 있었겠는가.
‘추상을 왜 하세요?’ 가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건네어 보면, 결국 나도 잘 모르는 지금 내 상태를 알아채기에 이만큼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도통 답이 나오지 않을 땐, 내가 놓치고 있는 ‘현 위치’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구체적인 결과물에만 치중하다가 좁아진 시야를 넓히고, 불필요한 생각과 정보들을 도려내고 도려내면 남는 상(象). 그 상을 얻기 위해, 나는 추상을 한다.
그 절묘하게 뽑힌 모양을 지도 삼아 다음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
이제껏 늘어 벌려놓은 수많은 ‘나’에 관한 증거 속, 나의 현 위치는 어디인가? 혹시 지금, 생각도 못 한 곳에 홀로 서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