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우리가 자신을 모르는 이유
예술가가 창작 활동을 유지하려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거나, 안정적인 후원처를 찾거나, 본인의 작업으로 수익화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스스로를 후원할 수 있는 다른 경제활동을 해야만 한다.
나는 가장 마지막 방법을 택했고(실은 선택 가능한 옵션이 그것뿐이었고), 처음에는 파트타임 일을 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2013년 두 번째 개인전 때는 준비에 든 비용보다 높은 수익을 내기는 하였지만, 개인전이란 것이 일 년 동안 작업에 올인해야 겨우겨우 한 번씩 열 수 있는 전시임을 감안하면 연봉이 300만 원에 불과한 셈이었다. 긴 해외 생활로 얻은 빚도 있는데, 고작 연봉 300만 원? 앞으로도 이런 기약 없는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 끝에 일단은 제대로 직장을 잡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경제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미대 진학부터 석사 유학까지,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이미 당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해 주신 부모님께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귀국 후 채용 전형 대기 없이 곧바로 생활비를 벌 수 있는 풀타임 영어 강사로 1년 정도 일을 하다, 후두염 진단을 받고 그만둔 후에는 말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일반 사무직을 선택했다. 원래는 해외 영업이나 무역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관련 베이스가 없어 서류 탈락을 거듭하다가 전공인 디자인과 우회적으로 관계가 있는 광고 분야로 눈을 돌려 소규모 방송 광고 대행사부터 들어가 차근차근 실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말이 AE였지 콜드 콜과 대면 영업이 8할이었던 첫 번째 대행사에서, 가끔 가뭄에 단비 같은 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바로 미팅 말미에 클라이언트가 예술 분야에 관한 화제를 꺼내는 일이었다. 한바탕 신나게 떠들고 손님을 보내고 나면, 내부에서 돌아오는 것은 핀잔이었다. 이야기하는 것은 좋지만, 담당자가 비전문적으로 보이니 이전 예술 관련 경력은 되도록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건 취미에 불과하지 않으냐고.
남들 기준의 ‘취미’를 계속하기 위해 시작한 나의 늦깎이 사회생활. 39°C의 고열 속에 갇힌 듯한 숨 막히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숨 쉬는 법을 체득하고 실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몇 개의 분야별 광고대행사를 더 거친 후였다. 카피라이터로 채용을 해놓고 온갖 디자인 업무와 영업까지 떠맡기는 등, 별의별 회사가 다 있었지만 그럼에도 꽤 굵직한 클라이언트들과 안면을 트고 그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일하면서 통합적인 마케팅 기획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전체 프로젝트 중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했지만, 대행과 재대행이 만연한 구조 안에서 꽤 많은 것들을 관찰하고, 실행하며 배우게 되었다.
4~5년 차부터는 인하우스에 들어가 직접 미디어 믹스를 하고 예산을 집행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은 예산을 전혀 주지 않는 곳에서 1년간 온갖 무가 협찬과 그 외의 ‘돈 안 드는’ 홍보 활동에도 매진했었다. 힘에 부쳤지만 제품력이 좋으니 관련한 기회가 계속 생겼고, 그 나름의 희열도 있었다. 유통사 출신 사장님의 지속적인 여직원 외모 비하나 회의 중 고성 같은, 요즘 보기 드문 요소들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3년쯤 더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36.2°C. 정상 체온이 아니면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팬데믹 기간에 이르러서야 나는 고열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작품 활동을 했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회사원으로 살아낸 것이다. 2021년에 퇴사 후 프리랜서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회사원이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같은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회사에 다니면서 몇 번은 작업실을 대여하여 써 보기도 했는데, 예전만큼의 에너지가 응집되지는 않았고 월세만 급히 내다가 접기를 반복했다.
결국 다시 완벽히 몰입할 수 있을 때까지, 나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마음의 부채로 남아 있던 작업 재개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니 일에도 더 몰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성과를 내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직을 만나 좋은 조건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유리 공예가인 친동생과 함께 쓸 작업실도 새롭게 마련했고, 퇴사 후 2023년까지는 내가 넣어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적극적으로 국내외 전시에 출품했다.
경제적 안정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기까지, 숱한 열병을 앓았다.
거친 화풍의 예술가가 조직에서 제 몫 이상을 너끈히 해내는 직장인이 되기까지,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 때마다 글로 도피한 덕에 녹진한 기록들이 남았다. 종유석처럼 굳어진 흐르는 감상들 또한 일(Work)을 하면서 생긴 작품(Work)이라고, 이제 와 회고한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그림만 그리던 시절보다 강렬함은 없을지라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들의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는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것 또한 그만의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살면서 “당신은 예술가입니까, 회사원입니까?”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아 보았지만, 사실 이에 대한 답은 큰 의미가 없다. 눈에 보이는 구상적 요소, 즉 껍데기만 가리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가 진짜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떤 질문을 해야 그 답을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사람들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 또한, 인생의 한 챕터, 한 챕터를 지나면서 그만큼 선명하게 드러난 조각들을 모아 ‘나’라는 거대한 퍼즐을 맞춰 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걸어오며 얻은 많은 정보들의 겉면을 깎고, 덜어내고, 물에 적시고, 다시 말려 추상화하면, 나는 결국 주어진 삶에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수집한 생각을 숙성시키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셋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남는 ‘표현’이다. 나에게 있어 표현이란, 발효된 술의 표면 위로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듯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 나는 추상하고,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내가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장르를 특정하지 않고 일관된 결로 빚어낼 수 있는 이유이다.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단서만으로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결정해서 시작한 인생 여정은 아니지만, 현재를 지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에 관한 정보 값들을 오롯이 스스로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모든 정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보일 때까지, 초점을 흐려도 보고, 더 확대되지 않을 때까지 펼쳐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지금 내 마음이 힘든 이유가 ‘나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라면, 지금이 바로 스스로에 대한 추상을 시작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