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꼭 취직해야만 기록연구사 되나요
이사 갈 때마다 거북이 등짐처럼 매고 다니는 물건이 있다. 일기와 옛날 기록이 담긴 박스다. 우체국 택배 상자 5호쯤 되는 상자 네댓 개에 노트, 수첩, 출력물이 가득 담겨 있는데 이게 무게나 부피나 보통 짐이 아니다.
‘정리 좀 해’ 엄마는 상자를 볼 때마다 말씀하셨지만, 정리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것이 정리를 하려면 일단 내용물 파악을 해야 하는데, 빽빽한 글씨로 가득한 저 노트를 일일이 살펴 ‘버릴 것’과 ‘보관할 것’을 구분하는 게 쉬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버리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물건. 이쯤 되면 내가 저 상자를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상자가 나를 데리고 다니는 꼴이다.
대학원 입학 면접장에서 기록하는 일에 각별한 뜻이 있음을 어필하기 위해 나는 그렇게 말했다. 교수님이 되물었다. “그 기록을 정리하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나요?” (아니용, 없는뎅Y.Y 그냥 쌓여있어요.) “그래서 공부하면서 배워보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기록학은 일기를 정리하는 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어쩌면 개인 일기를 정리하는 일은 '관리'의 범주가 아닐지도) 무엇보다 기록은 저렇게 쌓여만 있어서는 기록의 힘도 역할도 발휘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더불어 공부하면서 알게 된 건 두 가지 팩트였다. 1) 나는 기록을 생산하는 일에만 아주 열심이다. 관리가 중요한 걸 알지만 잘 못한다. 2) 정리는 아무래도 타고난 성향 같은데, 나는 평생 정리나 관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 지금도 주변 정리가 안되는 걸 뭐...
그래도 공부하는 내내 저 박스를 잊지 않았다. 내 과거의 블랙박스,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 저걸 어쩐다? 어쨌든 내가 이 동네에서 발 디뎠으니까, 다른 건 못해도 저 박스 하나는 정리하고 만다! 아무도 내지 않은 숙제를 혼자 계속 미루고 있었다.
우선 기록물의 상태를 보자. 초등학교 때 의무적으로 쓴 일기장 외에 다른 기록들은 기록의 형식이나 양이 일정하지 않다. 스프링노트, 다이어리, 연습장, A4용지 등등. 문제는 내가 새 노트만 보면 헌 노트를 잊고 마는 사람이라 끝까지 채워진 노트보다 앞부분만 기록되어 있고 절반 이상 쓰지 않은 노트도 허다하다.
1차적으로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절반 이상 쓰지 않은 노트는 기록된 부분만 오려내고 버렸다. 자, 그럼 이제 시간 순서대로 배치하고, 어떤 내용이 있는지 파악하면 정리가 끝나는 걸까? 아니면 데이터로 변환하거나 스캔이라도 한 후에, 부피를 차지하는 실물을 버릴 수 있어야 정리가 끝나는 걸까?
과거의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야 할까? 이 정리 작업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과연 정리한 후에 저 일기를 버릴 수 있을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업이지만 나에게는 꽤 많은 질문이 숙제처럼 따라오는 일이다.
복잡한 감정도 불러일으킨다. 하루 빨리 저 상자를 처치해버리고 싶은 마음과 묘한 호기심이 뒤섞여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저 과거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혹시 내가 지금 잃어버렸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기억에서 지운 흑역사가 대부분이겠지만...)
이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내 기록을 정리할 것이다.
내가 나의 기록연구사가 된다.
내 전공 분야와 관련있는 일이지만, 사실 오롯이 개인 프로젝트일 수 밖에 없다. 이 정리와 관리의 목적이 공개적인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한 게 아니고, 어떤 이용자를 위한 것도 아닌 오로지 나 개인을 위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제까지 남의 기록을 원칙대로 정리만 해왔지, 정작 나의 기록은 정리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작업의 방식 역시 기존 기록학에서 얘기하는, 기록의 4대 속성 보다 나의 관점과 나의 방식을 우선해서 진행할 예정이다.
말만 거창할 뿐. 사실 아직 어떻게 손 대야 할지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일단 기록물 파악이 우선이다. 이번주부터 하나씩 읽어보기로 한다. 떠나요, 과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