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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Aug 28. 2021

일기에는 오늘의 무엇을 남기면 좋을까?

5. 변하고 마는 것, 헤어지는 것들을 기록해야겠다



아악, 그만해

제발 그만 좀 해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과거의 나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20대 초반이잖아. 고민 좀 그만해. 걱정 좀 그만해. 어차피 그거, 간절히 바라는 그 일 안 될 테니까 그냥 마음이나 편하게 살아. 지금보다 훨씬 가볍고 날렵한 몸이잖아. 훨씬 예쁘잖아. 그땐 마스크도 안 끼지? 15년 후에 코로나19라는 거대 질병이 전 세계에 퍼져서 마스크를 돌아다니는 형국이 온다고. 안믿기지? 그러니까 고민은 그만하고, 계획은 그만 세우고 그냥 놀아. 나가서 즐겨.      


그땐 정말 상상도 못했지. 15년 뒤 세상이 이렇게 바뀔 줄은. 그리고 내가 이런 아카이빙 프로젝트라는 명목으로 그때 쓴 일기를 다시 읽고 있을 줄은! 알았다면 결코 이런 기록을 쓰지 않았겠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모르겠고, 사흘 내내 똑같은 고민 속에 빠져있다는 건 알겠다! 고민이 생길 때만 일기를 쓴 걸까?


대학교 초년생 때 일기는, 그 한창 좋은 시절 날씨도 안 써있고, 무엇을 보고 들은 것도 안 써 있다. 술자리만 반복되는 낯설고 정둘 곳 없는 신입 생활, 그때부터 공무원 시험에 돌입한 H, 편입 시험 준비에 몰두한 M, 단짝친구인 D는 여군에 입대해서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지금보면 하나도 급할 것 없는 스무 살, 스물 한 살이었지만, 주변에 뭔가 목표를 갖고 매진한 친구들을 보면서 괜히 조급해지고 막막해했다. 그냥 뭔가 목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 고시원 생활도 마다않고 장래 계획을 읊어대는 H는 의젓해보였고, 매일 도서관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앉아 공부하는 M도 단단하게만 보였다. 나는 막연히 PD가 되고 싶었지만, 정말 PD가 되면 좋을까?를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일기장에는 계속된 의심과 끝없는 망상 뿐이다.     


'카더라'로 분석한 PD의 현황과 미래...ㅋㅋㅋㅋ 으악, 딱 봐도 관심 없고 마음 없는 거 티나는데..


이 무렵의 일기를 읽는 게 너무 괴로웠다. 아악, 고통스러워. 젊은 내가 괴로워하며 시간을 축내는 것을 문장으로 확인하는 거 꽤나 고역이다. 내 생기발랄하게 느껴졌던 20대 어디가고 이렇게 회색빛만 가득한거지. 이 기록이 지금의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냔 말이다...


그때 친구 M에게 연락이 왔다. ‘고릿적 유물을 발굴했습니다ㅋㅋㅋㅋ’     


20 M 캠코더를 자주 들고 다녔는데,  캠코더에 담긴 옛날 영상을 우연히 발견했다며 공유해줬다.  축제가 끝난 서울시청 광장에 앉아서 서로 진지하게 마주보며 ‘갑자기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건가요?’ 식의 뜬금없는 질문에 골똘이 대답하는 영상인데, 어처구니가 없게 웃겼다. 하지만  기억속에 있는 20 풍경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영상   보여줘.  아카이브에 영상기록 좀 제공해주라.”


고릿적 영상을 발굴해온 초스코님...


며칠 후 M과 종로5가에서 만났다. 일단 광장시장에서 빈대떡과 육회로 근황을 나누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로 가서 그 옛날 고릿적 영상을 함께 감상했다. 각각 클립은 길지 않지만, 개수는 꽤 많았다. 기억 속에 없는 시간과 장소가 생생하게 재생됐다.      


“와,  온다


눈바닥에 동시에 드러누워 날개짓하는 장면, 우우우우우~ 러브스토리 OST를 따라부르는 장면, 놀러가는 차안에서 노래를 열창하는 장면, 진지하게(그래서 더 웃기게) 서로의 장래희망을 나누고, 마치 서로 이룬 듯이 천연덕스럽게 대화하는 장면이 영상을 통해 아스라이 기억에 떠올랐다.


  없이 꺄르륵거리고, 어깨를 들썩거리고, 수다를 떠는 모습에는  일기장에 있던  숱한 고뇌와 고민의 늪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저런 낮과 그런 밤을 보낸 시절이었다.     


영상은 완전  사람 같네. 일기장엔 고민 투성인데.”


“일기는 방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면서 쓰잖아. 글은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쓰지만,  영상은 녹화버튼만 눌러도 텐션이 올라가니까.”  

    

M 대화하며 나는 이해할  있었다. 내가 보는  기록이 나의  시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문서와 영상이라는 매체의 특성에 따라 기록은 이토록 다른 온도차를 낸다는 것도.


떨어지는 눈송이에 설레 뛰쳐나가 소리 지르는 것도 나고, 비오는  빗소리도 듣지 못한채 마음에 우물만 들여다보고 있던 것도 나라는 것도 알았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기록하는 행위여야 할까?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요즘의  일기도 습관적인 기록인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고민들, 금방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어제의 기록에도 오늘의 기록에도 드리워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글을 푸념처럼 늘어놓으며 위로받거나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분량의 일기를 읽고 있자니, 앞으로는 생각보다는 오늘의 감정을 적어야겠구나 싶다.


변하지 않는 어떤 것보다 변하고 마는 것을 남기고 싶다. 바람이나 구름, 오늘 나눈 대화나  떠오른 생각 같은 - 나를 스쳐간 오늘의 어떤 것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진로고민도 중하고, 이직 걱정도 중하지만, 그건 오늘 내일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오늘 새로 만나고 오늘 헤어진 어떤 것을 기록해보자고. 오늘부터는 그런 일기를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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