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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Aug 08. 2021

멋진 애 옆에 멋진 애가 되고 싶은 욕망

4.덕질하게 만드는 여자들

어리버리하지만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2002년부터 2005년까지의 일기를 읽다.


이때는 한 노트에 꾸준히 기록하지 않고, 여기 저기 새 노트에 한두 달씩 기록을 해두었다. 몇 장 밖에 쓰지 않은 노트를 계속 보관할 수 없어서 기록한 부분만 뜯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고3, 대학 입학을 앞두고 공부와 성적 고민, 진로고민이야기가 많고, 수능이 끝나자마자 시작한 첫 알바, CGV 알바 생활 기록이 담겨 있다. 또 이 당시에는 동생과 꽤나 가깝게 지냈는지, 동생에 대해서 사랑스럽게 묘사한 기록이 눈에 띈다. 동생과 자기 전에 서로 꿈꾸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곤 했는데 그 시간을 ‘나이트 어드벤처’라고 적어두었다.  

    

예능 느낌표와 드라마 풀하우스, 파리의 연인이 당시의 나에게 주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드라마 주인공 한지은(송혜교)와 강태영(김정은)한테 완전히 감정이입해 있다.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저런 씩씩한 여자가 되고 싶어’ 이 무렵 내게 여성상으로 다가온 캐릭터는 캔디처럼 씩씩한 이들이 전부였으니까.


어리버리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럽고 씩씩한. 이게 내가 10대 시절 꿈꿨던 여성상이었다.


나도 나 스스로의 이상향을 잘 웃고, 싹싹하고, 고난을 극복하고 결국 사랑받는 여성상으로 그렸더랬다. 이때 좀 더 풍부한 여성 캐릭터를 접할 수 있었다면, 아마 조금은 다른 내 모습을 그렸을 것 같다. 지금은 잘 웃고, 싹싹하고, 극복하고 사랑받는 캐릭터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내 이상향은 아니다.


그보다는 웃을 필요 없는 자리에서 애써 웃지 않는 사람, 어리버리하고 싹싹하기보다는 분명하고 세심한 사람이 이제는 훨씬 멋지다. 그건 한지은이나 강태영 말고 내가 자라면서 '다른 여자들'을 더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다. 좀 더 어렸을 때부터 더 많은 여자 캐릭터들을 보고 듣고 경험했다면, 나는 어떤 어른을 꿈꿨을까?



한지은, 강태영 이름 너무 자연스럽게 자주 등장해서 친구 이름인 줄 알았...





진짜 후회 없습니다. 이거는

후회없는 경기가 맞고요



오늘 오전에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4강전이 열렸다. 졌다. 여자 배구 경기를 한번 더 볼 수 없다는 것이 애통할 뿐, 누가 이 경기의 승패를 운운하겠는가? 진 경기로 기억하겠는가? 그저 여자 배구 대표팀의 4강전 경기였고, 기대하지 못한 4강전 경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코로나 시국의 도쿄 올림픽이라니 누가 보겠어? 싶었지만 왠걸. 이번 도쿄 올림픽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너무 멋진 선수들을 만날 수 있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금메달이나 좋은 성적과 관계없이 이들의 주옥같은 인터뷰 때문에 나는 자주 가슴이 벅차고 웅장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좋은 결과를 얻어야 좋은 경기를 한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 기간 동안 선수들의 이 인터뷰를 보면서, 좋은 경험의 기준은 성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경험이란 성적이나 누군가의 칭찬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계속 보고 들었다.


자신의 최선의 경기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둔 사람의 말들... 보고만 있어도 짜릿하다


멋진 애 옆에 멋진 애가

되고 싶은 욕망


저 멋짐에 완전히 설득됐고, 그게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 '하든지 안 하든지 둘 중에 하나지. 그냥 노력하겠다는 말로 대충 넘어갈 생각하지 말아라'는 김연경의 말이 오늘의 나를 응원하고 일으켜 세운다. '표정이 죽는 중이야. 시발, 웃어' 이 말만 되뇌어도 그 목소리와 표정이 떠올라 웃게 된다.


예전에도 그랬다. 아마 예전에도 한지은이나 강태영 같은, 드라마 캐릭터들의 대사에 기대어 지루한 일상을 보내곤 했다. 10대는 '아자아자 파이팅' 같은 것으로도, 고난을 극복하고 나면 남주를 만나 해피엔딩일지 모른다는 드라마의 판타지 정도로도 기운이 나곤 했다.  


가상의 캐릭터를 친구 삼아 언니 삼아 흠모하고 덕질하는 재미가 일상에 얼마나 큰 활력을 주던가. 하지만 20대를 지나고 30대가 되어서는 왠만한 해피엔딩에는 조소를 날리는 생활인이 되었고, 멋진 사람의 아내(드라마의 해피엔딩은 결혼이니까), 사랑받는 여자 캐릭터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여느 드라마 여주인공 대사에도, 여느 석학의 좋은 말씀에도 마음이 기대지지 않았다. 다른 여자 캐릭터가 필요했다.  


30대에도 덕질은 필요하다. 나를 투사하면서 긍정적이고 전투적인 에너지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캐릭터가 내 삶에는 더 많이 필요하다. 이번 올림픽은 이런 의미에서 얼마나 많은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는지! 나이를 불문하고 나를 온전히 투사해도 꺼리낌없는 매력있는 여자 캐릭터를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었는지!


세상에서 제일 멋진 기미진 언니... 언니 보고 나도 운동할거야…


그게 이번 올림픽에 가장 빅재미였다.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라는 저 평범한 말 역시 매트 위에서 땀흘리는 김연경의 목소리로 듣지 않았다면, 세계관 최강자의 대사로 듣지 않았다면 이토록 와닿지 않았을거다.


여전히 매력적인 사람을 닮고 싶은 마음, 멋진 애 옆에 멋진 애가 되고 싶은 욕망은 일상을 얼마나 고무시키는가. 매력적인 캐릭터를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나는 계속 드라마를, 영화를, 책을 보는 게 아닐까. 오래전 일기와 오늘자 tv중계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마무리할때 그들처럼 말해야지. 최선을 다했다고. 아무 후회 없을 만큼 좋은 시간이었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푹 쉬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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