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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Aug 07. 2021

15년 전 일기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3. 정리의 원칙을 정했다

어떤 결과물이 나오면

좋을지 상상했다


1998/ 12/ 31



기록물을 수집하고, 조금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두서없고 방대한 기록을 어떻게 정리해나가지? 나는 며칠 만에 깨달았다. 왜 이제까지 이 기록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는지. '아, 나는 원래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구나.'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까지 못했는데 이제라고 할 수 있겠어?'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어차피 잘 안 될 테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 거북이 등짐 같은 이 기록들, 꺼내 들었으니 어떻게든지 여기서 결과를 보고야 말겠다. 나는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볼 생각이다.      


7월 한 달 간은 기록을 어떻게 정리할지 원칙을 세우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나의 정리 원칙>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순서대로 정리할지, 무엇을 기준으로 정리할지, 기록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하나하나 단순한 것부터 적어나갔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씩 시작할 수 있었다.        


1. 일기 기록을 전부 수집한다.

2. 각 기록물의 메타데이터를 엑셀파일에 기록한다.

3. 본격적으로 정리를 한다... 그런데 이 정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세 번째 단계에서 막혔다. 이때는 어떤 결과물이 나오면 좋을지 상상했다.


처음에는 기존의 일기 기록을 조각조각 엮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기 기록을 읽다보니 생각보다 기록의 내용이 다양하지 않고, 비슷한 고민과 일상이 반복되는 부분이 있었다. 또 지금의 생각, 지금의 삶과 연결되는 내용이 많아서 지금 시점에서 ‘다시 읽기’ ‘다시 쓰기’를 수행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물을 정리하고 대부분 폐기할 생각이었는데, 이 부분도 좀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일단 전량 디지털화한 후에 물리적 기록은 부분 폐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정리 항목은 아래와 같이 원칙을 세웠다.      


1) 과정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 작업이므로 읽는 과정을 기록한다.

2) 필요한 부분은 발췌한다. 기준은 선택이나 변화에 관한 내용, 시대적인 배경이 보이는 내용이다.

3) 기록을 디지털화하고, 데이터는 기록철 별로 분류한다.



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대로구나


2004/07/30 제목: 게으름에 관하여 (1)


나는 내가 점점 변해왔다고 생각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그런데 요 며칠 일기를 읽으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변하지 않았구나, 그대로구나’ 특히 내가 문제를 고민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답을 찾는 방식은 정말 너무나 한결같아서, 어떤 기록은 마치 지난주에 일기장에 쓴 내용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내 기억 속에 나는 걱정보다는 패기가 넘쳤고, 자존감 충만했고, 좋아하는 게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실제 기록 속에 나는 늘 고민이 많고 나의 부족함을 자책했다. ‘이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맞나’ 고민하고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20대에는 워낙 실행력이 지금보다 좋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계속 시도하려고 했다는 점이 좀 다르지만.     


처음에는 불편하고 불쾌했다. 너무 지금의 나랑 닮아있어서 사실 몇 번이나 읽다 덮어버렸다. 읽을수록 기분이 가라앉았다. 기쁘고 설레는 일은 드물었고, 대부분 고민에 관한 기록이었다. 반성하고 계획하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보니 어떤 시절은 대단히 평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 나 지금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걸까? 매일하는 똑같은 생각을 계속 적어대고 있는 건 아닐까? 감각은 없고 왜 생각만 있을까? 그때 내가 어떤 풍경 속에 놓여있는지 문득 궁금했다. 그때의 감각이 궁금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감각하면서 살고 있을까?     



2004/07/27 "추억은 나눈 사람과만 공유할 수 있는 기억" 그런 기억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단호하게 써둔 대목이 마음에 남았다.


일기를 계속 읽다보니 처음에 했던 질문이 바뀐다.      


처음에는 '이 작업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게 내 질문이었다. 시간 낭비 아닐까? 뭘 이렇게까지 유난스럽게 나를 들여다봐야 할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점차 질문이 바뀐다. 이 기록은 나에게 무엇일까? 이 과거는 나의 무엇으로 남았을가? 정리라는 것은 무엇을 남기는 행위일까?      


기록을 보니 그때 내 세계의 크기가 보인다. 그 세계 속에 몇 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지가 보인다. (그땐 가족들과 친구 몇 명뿐이다.) 내 시야가 어디까지인지도 읽힌다. 그래서 계속 지금의 내게 질문하게 된다. ‘지금은 어때? 지금은 어디까지 둘러보고 살고 있나?’  


그때 고민 많던 내 기록을 보면서 ‘그건 별일 아니야. 걱정 마, 다 지나간다.’ 라든가 ‘그때 그 사람 안 만난 거 천만 다행인줄 알아.’ ‘조금만 기다려. 곧 기회가 생긴다’ 자꾸만 혼자 대답을 하게 된다. 지금처럼 예전에도 걱정이 진짜 많았다.


지금처럼 예전에도 대학 때문에, 취업 때문에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처럼 예전에도 외로움이 많았다.... 계속 읽고 읽다보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 주변을 얼쩡거리는 불안과 내 고민에도 스스로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업을 하면서 그 답을 찾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03/12/14 나는 되게 가고 싶은 대학교에 갔다고 생각했었는데, 불교대학이라고 엄청 후회하고 걱정했던 기록 보고 빵터짐. 경 외는 소리라니...



2004/01/10 예전부터 용서를 잘하는 편. 너무 쉽게 선물해서 문제다.



2004/08/07 응, 있잖아. 그건... 앞으로 11년 후에나 알게 된단다? ^^^ 많이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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