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업의 아이디어
개인기록 아카이빙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은 사례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조선 후기 무관이었던 노상추가 쓴 일기다. 그는 열일곱 살이던 1763년부터 84세로 사망한 1829년까지 67년간 일기를 썼다. 18세기, 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이 담긴 역사적 사료로서 그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은 무관이었던 노상추의 일기에는 관직생활과 개인의 일과, 생활 풍습, 희노애락 등 다양한 감정의 기록들이 담겨있어,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정조의 병환, 독살설, 인동작변 등 그의 삶 가까이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의 기록도 남아있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물론 그가 이름 없는 무관이었다 할지라도 조선시대를 살았던 남성이라는 정체성은 그 당시를 보는 그저 하나의 시각일 뿐이지만, 어쨌든 개인의 기록이 무엇을 보여주고 말해주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말하지 않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더없이 귀한 자료다.
내 일기는 노상추의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노상추의 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기록 속에는 과연 ‘나’만 있을까? 내가 살았던 시대는 어떻게 담겨있을까? 내가 살면서 내린 모든 결정이 온전히 나의 결정이었을까? 조선시대도 아니고 1970년대도 아닌, 1990년대를 살았던 나의 세계는 어떻게 내 일기장에 담겨 있을까? 만약 시대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일기는 어떤 식으로든 공유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또 하나는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던 때, 현대미술관(MACBA)에서 본 한 예술가의 아카이브 전시였다. 전시장 한켠에 마련된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생애를 주제로 한 기록 전시였는데, 열 개쯤 되는 액자에 자신과 관련된 사진과 기록을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그래, 이거다! 모든 기록이 똑같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기록이 남겨질 필요도, 공개될 필요도 없다. 기존의 맥락 못지않게 지금의 시점으로 재구성된 맥락이 중요하다. 이 작업은 대단한 나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이 아니라, 2021년 지금 이 시점에 내가 필요한 이야기를 찾기 위한 작업이기 때문에, 나 역시 내 기록을 재구성하고 그 결과물 역시 보기 편한 방식으로 디자인할 것이다.
이렇게 나의 아카이빙 북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사실 말만 거창하지, 기록을 붙들고 과거를 해매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고 지친다. 일단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걸 왜 하고 있나’ 자괴감이 들 때도 자주 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취업하는 데 필요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졸업이라는, 내 삶의 또 하나의 변곡점을 앞두고 나는 내가 오래 고민해온 어떤 문제들을 풀어보고 싶다.
그 문제들은 항상 과거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데, 어떤 것은 후회로, 어떤 것은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선택으로 남은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한번 재구성해보고 싶다.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화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작업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우려가 있다. “내가 과거를 보고 싶은 대로만 볼 위험”에 관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공개적인 작업이 될 것이므로 결과물도 남의 눈을 의식해서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게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어떻게 장담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 부분은 작업 과정을 기록하면서 풀어나갈 생각이다.
별도로 심리학이나 관점에 관한 책을 함께 읽어볼 계획이다. 기록을 볼 때 편견이나 특정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읽어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일기에 담긴 인물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작업 역시 이 작업의 균형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과연 이 작업에서 뭘 발견할 수 있게 될까?
코로나 시국, 저는 방구석에서 과거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