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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Sep 12. 2021

우리가 나눈 사랑의 문장들

8. 서로 이름 부를 수 있을 때, 좋은 걸 충분히 누렸으면 좋겠다

친정집에서 오래전 기록을 모아둔 상자 한 박스를 가져왔다.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쓴 노트, 상장, 여행지에서 모으거나 생산한 기록물 등이 들어있는데 개중 가장 많은 기록은 편지였다. 친구들과 나눈 쪽지, 가벼운 인사가 담긴 카드, 몇 장의 종이를 뭉쳐 접어 넣은 두툼한 편지 봉투들을 보다보니 순식간에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박스 속에서 쏟아져나온 사랑의 문장들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남겼을까


일기는 오롯이 나의 시각, 나의 세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만, 편지는 보낸 사람의 글만 남아있다. 내가 쓴 편지는 그이에게 가 있겠지. 특히 대학교 시절 손편지를 자주 주고받곤 했는데, 그건 군대간 친구들 때문에, 또 내가 국문과를 다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몇 번이나 오고 간 편지, 그러니까 나에게 남겨진 그들의 글뭉치 속에서 그 당시의 시절이 또다른 온기와 또다른 색깔로 그려졌다. ‘-합세, 보세, 그럽세’로 허세가 잔뜩 들어간 말투의 편지글에는 나에게 한껏 멋을 부리고 싶어 하는 귀여운 마음이 느껴졌고, 나와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조곤조곤 고백해둔 글에는 글쓴 친구의 젊잖고 따뜻한 성품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결국 너는 네가 쓴 편지를 확인하지 못했지. 나도 네가 쓴 편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내가 쓴 편지 내용은 잊혀지지만 네가 쓴 편지는 남아. 물론 이건 너도 마찬가지. 네 편지도 궁금하지만 내가 보낸 지난 편지도 궁금하군. 다음 편지는 올해 안으로 볼 수 있었으면. 


문득 친구의 편지를 읽으며 깨달았다. 내 편지도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이렇게 남아있겠구나. 나는 뭐라고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말처럼 흘러가버리지도 않은 채 내가 쓴 어떤 글들은 완전히 모르는 주소에 기거하고 있겠구나. 


물론 아예 사라졌을수도 있지만, 나와 편지를 나눈 친구들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아마 나처럼 어디 한쪽 박스에 보관해두고 있겠지. 나는 이 친구들에게 뭐라고 편지를 남겼을까? 그 편지는 아직도 남아있을까? 편지는 이런 글이구나. 내가 한 말은 기억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한 말만 남는.      


한 여름에 쓴 '덥지마'라는 친구의 말이 이렇게 다정할수가. 나도 모르게 몇번이나 되뇌어 보았다. 덥지마. 춥지마. 도울게.


편지를 읽으며 또 생각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는 걸. 많은 친구들의 편지에는 ‘우린 아직 어리잖아. 함께 할 날이 한참 많잖아.’라고 써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바빠서, 멀리 살아서, 헤어져서 이런 저런 이유로, 아니 어떤 이유도 없이 대학을 졸업한 지금은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낸다. 사실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그때뿐이었다. 이걸 그때도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너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어”라는 편지 속에는 사랑이, 사랑의 문장이 가득했다. 그 당시에는 도저히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사랑이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그 마음도 충분히 사랑이었다. 반쪽짜리 열망도, 이도 저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덜 뜨거운 애정도, 네것도 내것도 온전히 괜찮은 사랑이었구나. 충분히 익기 전에 텁텁하고 시큼한 과일처럼 달지 않았을 뿐, 그토록 멋진 사랑을 갈망하던 나는, 20대에 아무런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슬퍼하던 나는 많이 사랑했고 어쩌면 많이 사랑받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그렇다.    



그 옛날 네가 

그 옛날 내게 보낸 말들


나 또한 한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그러한 가치들을 영위하는 삶을 살리라 다짐도 하고. 너의 손 꼭 붙잡고 지금처럼 이렇게 같이 걸어가자꾸나. 


이런 문장도 영락없이 사랑이었다. 소중한 진심을 옮겨적은 그 문장들-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각오를 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결심을 손끝으로 적어나가 내게 전해준 그 문장 역시 분명한 사랑의 언어였다. 


함께 하고 싶다. 같이 걷고 싶다. 곧 만나고 싶다는 평범한 말들이 어찌나 로맨틱하게 들리는지. 카톡이나 문자메시지, 이메일이 아니라 이렇게 종이에 꾹꾹 눌러 쓴, 그 사람을 꼭 닮은 글씨체의 문장을 보고 있으면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에 절로 주먹을 꽉 쥐게 된다.


그래서 이 사랑의 문장은 도무지 쪼갤 수도 없고, 온전히 기억도 하지 못하는 타인의 글이라 내 아카이빙북에 전체를 싣기에도, 일부 발췌하기도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랑의 문장은 오롯이 과거의 것이다. 지금 이 발신자들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이때 이 문장에 대해 서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의 발신자도 그때의 너, 수신자도 그때의 나일 테니. 


그러니 이 편지는 그대로, 상자 안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애틋한 마음이 그리울 때,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떤 추억의 감상에 젖고 싶을 때나 한번쯤 열어보는 걸로 충분하다고. 어떤 좋은 시절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하루 종일 오래 전의 문장 속에서 해맨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친구가 집근처 꽃집에서 예쁜 꽃다발을 보내 축하해주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꽃이었다. 예전에 꽃은 고작 일주일도 못가고 시들 꽃, 아름답지만 오늘 내일 존재하다가 사라질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 뜨자마자 와락 꽃다발을 안겨받으니 그저 기뻤다. 이런 저런 생각 따위 머물틈 없이 미소만 번졌다. 와, 예쁘다. 정말. 보고 있으니까 좋다. 계속 좋다. 


사랑할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까. 지금 이렇게 눈에 보일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 실컷 좋아하고 즐거우면 된다. 내일, 먼 미래, 먼 훗날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 당장 서로 부를 수 있는 이 시기에 좋은 걸 만끽하면 충분히 좋겠다. '나 처음이지만 꽃 선물, 너무 좋아. 너무 기쁘다'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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