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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r 20. 2022

내 기록, 어떻게 아카이빙 할까?

9. 내 인생의 순간순간을 모아붙여 발견한 것들

안전한 보존과

이용가능성


기록물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내용을 파악했으니 본격적인 아카이빙 작업을 시작했다. 아카이브는 동사이자 명사로 활용된다. 기록물을 보존하는 행위의 주체를 뜻하기도 하고, 기록물을 모아놓은 온오프라인 공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보존을 위한 기록 관리 시스템이나 기록 모음 등도 ‘아카이브’라는 말에 포괄적으로 담긴다. 이러한 맥락을 종합해보면 아카이빙이란 기록물을 보존하고 관리하여, 이후의 활용을 보장하는 활동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카이브가 단순히 기록을 수집하고 축적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시간이 지난 후에 필요한 기록의 활용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아카이브’라는 태그를 달아 사진을 축적하는 행위도 아카이빙이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필요한 앱에서 쉽게 찾을 수 없거나, 필요에 의해 활용할 수 없다면 인스타그램은 충분한 아카이브가 될 수 없다.      


필요한 기록을 쉽게 찾고,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 관리해야 한다. @느루양


안전한 보존과 이용가능성. 이것을 기준으로 우리가 아카이브 도구로 여기는 구글 드라이브나 유튜브 등의 플랫폼이 자신에게 충분한 아카이브가 될 수 있을지 판단해볼 수 있다.


개인의 기록은 플랫폼을 통해 충분히 아카이빙 할 수도 있지만, 국가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기록이나 자료를 언제든 회사 정책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는 기업 플랫폼에 보존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유튜브만 해도 하루 아침에 광고 정책을 바꾸거나, 업로드 제한을 걸어도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유산이 될 만한 기록이나 자료를 관리하는 데에는 공공아카이브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나의 일기를 내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안전하게 보존하고, 필요할 때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카이브의 목적이 설립됐다면, 이에 따라 단계별로 구체적인 아카이빙 작업이 필요하다.      


수집, 정리한 기록물 중 보존할 기록을 선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느루양



분명한 목적과 기준

으로 기록 선별하기


우선 기록의 선별 작업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선별 작업이 불필요할 때도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보편적 재난지원금과 같은 경우다. 선별하는 것이 오히려 비용이 많이 들거나 무의미할 때는 선별과정이 생략될  있다. 기록물의 양이 많지 않거나, 선별의 기준이 시간에 따라 변동성이 생길  있는 경우,  충분한 저장공간을 확보한 경우 굳이 선별하지 않고 전부 보관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나의 일기 아카이빙 작업은 애초에 물리적 공간의 한계 때문에 시작된 일기이 때문에 선별 과정이  필요했다. 시간이 정말 많이 드는 일이었다.     


선별하기 위해서는 선별의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기록물 선별의 경우 기록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전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 철저히 아카이빙 목적에 따라 선별되어야 한다. 내가 가족이나 친구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아카이빙을 하려는 것인지, 나의 성장이나 커리어를 확인하고 싶어서 아카이빙을 하는 것인지에 따라 선별되는 기록이 다를 것이다. 내 기록의 전문가는 나고, 나는 ‘내가 무엇을 ‘선택’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선택의 행위를 중점으로 아카이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무언가 선택, 결정하거나 결정의 배경이 된 사건이 담긴 일기를 발췌했다.      



기록이 아니었다면

기억하지 못했을 일들


이러한 선별과정을 통해 내가 오래 전부터 일기장에 소설과 희곡 형태의 글을 많이 써두었다는 것과, 일찌감치 영상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일을 시작하면서 영상에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대학교 초년생 때부터 (지금은 기억에도 없지만) 미디어센터를 다니며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고, 촬영을 하다 차가 끊겨 맥도날드에서 노숙을 불사하기도 했다. 기록이 없었다면 결코 기억하지 못했을 일들이다.      


내가 30대에 촬영하는 직업을 갖게 된 게 나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클래식 음악도 꽤 오래 전부터 관심 있었고, 내가 2007년 처음으로 쓴 방송 대본은 ‘러브레터’라는 클래식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계속 내가 좋아하는 일 주변에서 맴돌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관성 있게 행동했다. 좋아하는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찾아서 계속 했다. 들여다보면 자잘하고 매번 새로운 고민 같지만, 이렇게 몇 개의 기록을 선별해보니 나는 한결같은 고민을 하고, 한결같은 결정을 내렸다.      


남이 지어낸 이야기가 너무 좋다. 그런데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보고 듣고 읽고 싶다. 만들어보고 싶다.  
무대 근처에서 일하고 싶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사회 현장이 나에게는 가장 멋진 무대다.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는...!       


내 친구나 가족,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제까지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결정을 해왔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저 뻔한 말들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작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을 몇십 페이지로 압축해보는 기분이 새삼 묘했다. 이 기록은 내 삶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순간순간을 모아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호기심은 많지만 끈기가 없고, 새로운 일을 잘 받아들이지만, 무언가 관철할 만큼 의지는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일기 속에서 발견한 나는 내가 생각하던 나와 좀 달랐다. 순간순간 포기한 일은 많았지만, 좋아하는 일에 꽤 오래 매달려있고, 계속 원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아가고 있다. 중간에 휴학도 하고, 백수도 되고, 무력감에 휩싸여 방을 뒹굴거리기도 하지만. 잘 안될 거라고 못할 거라고 자조하면서도 아주 조금씩, 그쪽을 향해, 계속, 굴러가고 있었다. 기록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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