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만족도가 '좋아함'의 척도다
사무실에는 낡은 커피 캡슐 머신이 하나 있다. 사무실을 이사하면서 함께 구매한 게 아닐까 싶은데 우리 사무실에 상당히 오래 근속했고 여전히 열일하는 존재다. 딱 봐도 닳고 닳았는데, 아메리카노 같은 걸 뽑아주는 녀석 앞에 사람들은 아침에 한번 줄을 서서 커피를 뽑고, 점심 먹고 자리에 들어가면서 또 뽑고, 가끔은 윗층에서 일하는 사람도 커피를 뽑아 마신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이 커피 캡슐머신은 물 온도도 좀체 높아지지 않아서, 아메리카노를 뽑아도 미지근한 커피가 나오기 일쑤고, 커피 맛도 너무 연하다. 내가 사장이었으면 이놈의 커피머신 먼저 바꿨을 텐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쓰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지만, 내가 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커피머신 앞에 줄을 서는 대신에 사무실 주변에 카페를 전전한다.
잠 깨우거나 각성하려고 커피 마시는 게 아니라,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좋은 기분을 음미하려는 것이라서, 내 나름대로 검증을 거쳐 회사 근처에 작은 카페들 몇 개를 추려놓고 그때그때 마시고 싶은 커피를 사다 마신다. 가끔 재정 문제로 생활비를 조여야 할 때도, 하루에 2500원~5000원 정도 쓰는 이 한잔의 행복은 포기하지 못하겠다. 옷을 안 살지언정.
나도 새옷을 살 때의 즐거움과 기쁨을 안다. 더 나아가서 옷으로 자기 개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도 나 나름의 패셔니스타가 되고 싶어! 분명 그것도 나의 바람 중에 하나이긴 한데, 이건 욕망이라기보다 희망에 가깝다. 왜냐하면 나는 평소에 쇼핑을 하러 나가지도 않고, 휴대폰에 쇼핑앱이 많이 깔려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쇼핑하는데 지갑을 잘 열지 않기 때문이다.
패셔니스타는 내 평생에 이루고 싶은 꿈 100개 정도 안에는 들어있긴 한데, 실제로 나의 소비패턴을 살펴보면, 나에게 옷은 기능적인 측면이 강하다. 특별한 장소에 걸맞는 옷이 필요할 때 주로 구매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발표를 위한 젊잖은 옷. 여행을 위한 기능성 옷, 특정한 목적의 사진을 남기기 위한 옷… 이렇게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는 쇼핑을 하게 된다. 평상시에는 나 나름의 데일리 복장으로 정해진 옷들을 습관적으로 둘러 입고, 거기에 크게 불만을 갖고 있진 않다.
이런 내가, 지난 주에 25만원짜리 헤드폰을 샀다.
사실 한달 전에 온라인으로 6만원짜리 헤드폰을 샀는데 성능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헤드폰 성능을 비교해볼 심산으로 매장에 갔고, 좋은 헤드폰을 사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 아래 작은 소리로 ‘마음에 들면 50만원까지 지를 수 있어!’(봐둔 BOSS 헤드폰이 50만원이었다)라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아니 하루에 커피 고작 2500원짜리도 오늘 마실까, 마셔도 될까, 맨날 마시면 낭비가 심한 걸까? 같은 생각을 하는 내가 말이다.
나는 귀가 상당히 예민한 편이고 소음으로 자극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라, 좋은 성능의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이 늘 필요하다. 동시에 음악을 좋아하고, 좋은 소리를 듣는 걸 즐기기 때문에, 낮은 소리를 잘 잡아주는 헤드폰이 갖고 싶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헤드폰으로는 음악을 틀면, 낮은 소리가 잘 안들리고, 그렇다고 소리를 키우면 그냥 전체 음량이 높아져 시끄럽다고 느낀다. 이런 고충을 토로했더니 나 못지 않게 소리에 민감한 친구가 ‘좋은 헤드폰이 있으면 해결돼^^’라며 나를 매장에 데리고 갔고… 물론 헤드폰 치고 25만원은 저렴한 축에 속할지도 모르겠으나, 여하튼 나는 지금 나의 니즈에 쏙 맞는 헤드폰을 하나 데려왔다.
비싸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왜? 사운드의 개선이 내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헤드폰을 지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깨달았다.
돈 쓰는 데 마음 있다.
지갑 열리는 데 진짜 욕망 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 궁금하다면, 내 지갑이 어디서 열리는지 살펴보자. 배달음식처럼 돈을 쓰긴 하지만, 뭔가 진 느낌이 들거나(오늘도 배달이라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고가의 돈을 쓰고도 전혀 아깝지 않다(혹은 아깝지 않을 거다)고 생각하는 게 누구나에게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그게 여행일수도 있고, 운동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옷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게 나의 진지한 애정이라면, 돈을 쓰면 쓸 수록 나는 내 삶의 사운드에 관해 데이터를 더 쌓고, 더 디테일하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이 좋아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좋은 헤드폰, 좋은 소리에 대한 욕망은 지금 25만원짜리 헤드폰을 거쳐가는 것일 뿐,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아해, 라고 말하는 게 진심인지 알고 싶다면,
진짜 거기에 돈을 쓰고 있는가? 확인해보면 된다.
동시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일에 돈을 쓰자고. (좋아하지 않지만 자꾸만 돈이 새어나가는) 배달 어플 같은 데에 지출을 줄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혹은 좋아할 만한 일에 (기왕 사라지는 내돈...) 야무지게 돈을 써서 확인해봐야겠다.
이 소비가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이게 내 '좋아함'의 척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