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는 훈련이 취향의 해상도를 높인다
파이브가이즈 버거는 꽤 많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햄버거/치즈버거/베이컨치즈 중 하나의 버거를 선택하고, 그 안에 어떤 속재료를 넣을지 15가지 무료 토핑 중에 원하는 걸 선택해야 한다. 하나하나 넣거나 뺄 수도 있고, 추천 토핑인 8가지를 ‘올 더 웨이’라는 주문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밖에 '올 더 웨이'에 들어가지 않는 소스나 재료를 추가로 넣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올 더 웨이' 토핑을 기본적으로 선택하지만, '올 더 웨이'에 포함되어 있는 케찹 소스는 빼고, 스테이크 소스로 바꾼다. 파이브가이즈 버거는 고기 맛으로 먹는 버거라, 케찹보다는 스테이크 소스랑 먹을 때 풍미가 높아진다. 거기에 평소에 추가하던 할라피뇨는 제외하고 생양파와 랠리시를 추가하여 달짝지근하고 신선한 맛을 가미해보았다.
늘 먹던 취향과 새로운 시도를 조합해 오늘 나는 나에게 더 만족스러운 버거를 주문해 먹었다.
주문하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 햄버거 취향은 이렇게 정확하게 알면서...'
여기서 안다는 것은 뭔가?
케찹과 스테이크 소스가 더해진 고기 맛을 비교할 줄 알고, 어떤 속재료의 맛을 경험할 때 내가 만족도가 높은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처음에는 기본 버거를 먹었고, 다음에는 그때의 아쉬움을 떠올려 소스를 하나 바꿔보았고, 속재료를 넣거나 빼는 방식으로 여러번 시도하면서 알게 되었다. 고작 햄버거 얘기지만, 사실 대부분의 앎은 이런 식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처음 햄버거를 시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뭐가 맛있을지, 입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 버거를 주문하는 것.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거기서 좋았던 것, 나빴던 것을 기억했다가 다음에 또 햄버거를 주문할 때 개선해나가는 행위가 아닐까. 이 구체적인 행위는 일상에서 하루 혹은 한달 회고를 하거나,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이 되겠지.
이런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처음의 앎은 우연처럼 경험하는 것이라면, 두번째 앎의 경험은 훨씬 구체적이게 된다. 횟수를 늘려갈수록 경험은 지식이 되어 쌓일 것이다.
이번주에는,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마치 햄버거를 시키듯이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햄버거 가게에 가서 그냥 ‘맛있는 걸로 주세요’라든가 ‘아무거나’라든가 ‘사람들이 많이 먹는 걸로 할게요’라고 말하지 않고, 정확하게 ‘더블쿼터파운드 세트로 주세요.(좋아한다)’라든가 ‘콰트로치즈버거 주세요(좋아한다22)’라고 말하듯이 최대한 구체적이고 선언적으로 말하려고 애썼다.
이번 주에 내가 입밖으로 뱉거나 경험을 정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가장 좋아하는 뮤직비디오는 뭐야?
=청하의 I’m ready’랑 ‘EENIE MEENIE’ 뮤직비디오랑 댄스영상 좋아해. 이번주에 레드벨벳 슬기 신곡 ‘Baby, not baby’ 댄스 영상도 종일 찾아봤어. (내가 쉬는 시간에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콘텐츠는 K-pop 댄스 영상을 보는 거다)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는 누구야?
=슈베르트를 제일 좋아해. 아직 전곡을 들은 건 아니지만, 슈베르트 음악이라면 일단 흥미롭게 귀기울이게 되는 것 같아.
(이 말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슈베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슈베르트 음악에 더 관심을 갖게 될 수 밖에 없다. 입밖으로 꺼내놓고 나니 왠지 그에 걸맞는 사람이 더 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번주에 좋았던 시간은 언제였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중식당에서 긴 근황토크를 나누었고, 오늘도 다정한 사람과 요즘 내가 고민하는 것들에 대해서 길게 대화를 나눴어. 좋은 대화를 나누는 건 그 순간에도 영감을 주고 나를 확장시키는 기분이 들지만, 대화가 마치고 나서도 대화에서 남은 온기나 그때 떠올린 생각거리가 계속 내 주위를 맴돌아 곱씹게 되서 좋은 것 같아. 그래서 대화가 끝난 뒤에 불현듯 새로운 생각이 꼬리를 물때가 있는데, 그게 나에겐 가만한 시간에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아. 좋은 대화, 나는 좋은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은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
이렇게 오늘도 나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나는 이것을 좋아해’라고 말하는 그 작은 선택의 행위도, 훈련이 필요하다.
‘아무거나’가 아니라, 그 중에서 뭔가 하나 콕 집어 선택하고 결정해야,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해상도가 높아진다. 왜냐하면 그 결정에 만족하거나 후회가 들테니까.
그래서 다음주에도 햄버거 주문하듯이 답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