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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작 Apr 19. 2024

[E] 김철수 씨 이야기

퇴사를 허락하기 싫었던 후배에 대한 이야기

스피커에서 <김철수 씨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

너는 내 차에 올랐다

숨을 고르고 스피커를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고 라디오를 보고는 물었다

"이 노래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내 플레이리스트

(뜨악)"수석님이 이 노래를 아세요?"


너는 98년생이자 우리 회사가 첫 직장이고

나는 97학번이자 이 회사를 마지막 직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스무살 차이니 네게 나는 화석처럼 느껴졌을 터였다


이전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여름휴가를 앞둔 네게 뭐할 거냐고 물었더니

"음...꽤 넓은 광장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고

락밴드들이 공연을 하는데요, 제가 갈 곳은 인천쪽에"

-너 펜타가니?

(뜨악!)"수석님 펜타를 아세요?"


이놈아.. 나 펜타 1세대다...

지산도 가고 자라섬도 다녔다...

마음은 청춘이라지만 나는 타인에 의해 정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2년 12월에 너는 면접을 봤다

피면접인 3명 중 가장 활기와 여유가 있었다

면접관 3명의 만장일치로 너를 선택했지만

스펙도 좋고 성격도 좋은 너였기에 난 불안했다

그런 친구들은 대체로 3년 이상 우리 회사에 머무르지 않았다

더 넓은 세계, 더 좋은 회사를 찾아가는 선택이니 붙잡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너도 그럴 것이라 나는 예상했다


갓 대학을 졸업하는 네게는 모든 게 낯설었을테다

보고서는 커녕 메일 쓰는 것도 어려웠을테다

그런데도 너는 적응이 빨랐고 선배의 요청에 신입치고는 훌륭한 결과물을 가져왔다

봄에 들어서서야 네가 회사에서 웃는 걸 볼 수 있었다

긍정적인 성격이지만 그 겨울이 네게도 혹독했나보다


웃음을 찾고 나서는 이내 면접 때의 너를 볼 수 있었다

밝았고 씩씩했고 재미있었고 똑똑했다

그때까지도 나와 너의 거리는 스무살 차이에 머물러 있었다

비단 나이때문이 아니더라도

십여명이 속한 팀의 팀장인 나는 봐야할 프로젝트가 많아서 신입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우리의 거리는 출장을 다니면서 좁혀졌다

서너명씩 지방 출장을 가면 서로 얘기가 많아졌다

그때 네가 순댓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술 마신 다음날에는 아바라를 먹는다는 것을

소설을 좋아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내가 "X와 Z는 통하는구나!"라고 외쳤고 하마트면 악수를 청할뻔 했다

너는 웃었고 다른 팀원은 나를 나무랐다

"수석님 얘도 이제 사회생활할 줄 아는 거예요!"



그럼에도 너는 내게 곧잘 와서 일에 대해서 의논을 했고

밥 먹고 커피 마실 때에도 내 옆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만 자라온 너는 출장으로 팔도를 갔다

바람에 다칠까 키워졌을텐데 여름내 뙤약볕에서 일했다

그래도 너는 씩씩했다

아이들이 오면 너는 딱 고맘때 아이가 되어 맞이했다

고사리손을 가진 아이들과 모래속에 숨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찾을 때

아이들이 두 손으로 채를 들고 열심히 채를 칠 때

아이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자

너는 두 손을 모아 아이 이마에 그늘을 만들었다

뜨거운 두 손 아래 너의 이마는 빛났고

생긋 웃는 코는 주름지고 코끝에 땀 한 방울이 맺혔다

나는 그때,

네가 일의 재미보다 사는 재미를 더 잘 아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름에, 일손이 부족해 너와 나 둘이서 여수로 출장을 가야했다

김철수씨이야기를 들었던 때이다

우리가 친해졌다손쳐도 팀장인 나와 출장 가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다행히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했고 두 아이들은 충분히 아이스 브레이커의 역할을 다했다

태풍이 예보된 날이라 하늘은 음흉했고

바다는 조용하되 속을 알 수 없었다

공기는 습하고 날은 더웠다

아이들은 지쳤고 여수밤바다는 쾌쾌한 냄새가 났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지쳤겠지만 그래도 바닷가 왔으니까 회 먹을까요?"

너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며 씩씩하게 따라나섰다

너는 나와 회를 먹어주고

소주잔을 부딪혀주고

우리 아이들에게 장난도 쳤다

그리고 다음날 행사도 잘 해냈다

진행과 허드렛일을 모두 완벽히 처리했다

너는 정말 일 잘하는 팀원이었다


나는 성격과 달리 일할 때 칭찬을 잘 안 하는 타입이다

2023년에 난 딱 두 번 팀원을 칭찬했는데 그 중 하나는 너의 차지였다

내가 너무 바쁠 때 너는 중요한 계약서의 검토를 요청했고

나는 우선 알아서 해보라며 떠밀었는데

1시간 뒤 너는 카톡으로 보고를 했다

신입에게는 있을 수 없는 깊이로 검토하고

무경험자는 생각하기 어려운 해결책을 내고

너무도 정갈하게 요약해서 내게 보고했다

"00씨 잘했다. 똘똘하게 참 잘했네."

너는 감사하다며 톡을 끝냈다

다음날 나는 친한 타팀 팀장과 점심하며 너의 얘기를 했다

내가 같이 일하는 아이가 이렇게 똑똑하다는 걸 누군가에게 자랑하지 않고서는 못참겠기 때문이었다




그런 네가 11월 말 금요일에 면담을 요청했다

내게 면담을 요청하면 그 중 80%는 퇴사 얘기였다

월요일에 보자고 답했다

주말내내 나는 공상에 빠졌다

'퇴사 얘기겠지?'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 않나?'

'걔를 힘들게 하는 선배가 있으려나?'

'진짜 나간다고 하면 어쩌지?'

'왜 나려고 할까?'

'휴가가 많이 남았는데 그걸 상의하려나?'

'하는 일 다 놓고 당장 휴가가라고 할까?'

주말이 훌쩍 지났다

너는 나와 마주앉자 웃었다

네 웃음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퇴사하는구나'

큰 시험 준비를 하고 싶다고 했다

겨우내 준비해서 봄에 시험을 볼 거라고

그래서 12월에 퇴사를 하고싶다고

죄송하다고


휴가를 빼고 3주 정도 더 나왔던 것 같다

되도록 많은 팀원들과 더 같이 밥 먹고 술자리도 가졌다

그게 너를 힘들게 할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미안해" 너란 좋은 놈에게 즐거운 이별을 해주고 싶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너와 헤어졌다

마지막 가방을 싸고 엘리베이터에서 배웅할 때

선배들과 포옹하면서 불거진 눈자위의 진동을 참아냈다

내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나는 악수를 청했다

너는 쭈뼛쭈뼛 쉽사리 엘리베이터에 타지 못했다

어깨를 토닥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밀었다

그렇게 너는 갔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감동을 남기고 갔다





불혹을 넘어서니 쉽게 연을 맺지 않는 습성이 생겨 작은 인연도 이전에 비해 무게감이 다른 듯하다

막내의 반지리를 채울 새로운 '바보'를 면접하면서 그 아이에 대해 생각한다

순수하고 의욕 넘치는 이 아이들에게 나쁘지 않은 어른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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