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남자를 사랑해본 적 있으세요?
지독히 가난한데 넘치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으세요?
어느 대학을 가나 대학 복도는 어둡고 차갑고 스산했다
판상형 건물이라 복도는 끝없이 길었고 문 앞의 벤치는 섬처럼 고독했다
내 이름이 호명되는 걸 듣고 대기실을 나가 그 벤치 끝에 앉았다
다섯 자리 벤치에는 나까지 세 사람이 한 자리씩 비우고 채웠다
대학원 면접이었다
다음 순서인 첫 자리 여자는 메모를 보고 있었고
두 번째 여자는 고개 들어 앞쪽 벽을 보고 있었다
벽에 고정된 고요한 그 눈빛에 나는 널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됐다
잘 부푼 번의 곡선을 닮은 이마가 반짝였다
이마를 받치듯 눈썹은 짙고 힘있게 뻗었다
눈두덩은 아기 손등처럼 살짝 부풀었고
얇은 쌍커풀을 긴 속눈썹이 처마처럼 들어올렸다
심연 같은 검은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반대편 눈은 높게 솟은 코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코는 눈썹 사이에서 살짝 내려가다 능선이 솟았다
네 코를 따라가는 내 눈은 눈 사이에서 낙하하다 추진력을 얻어 내달린 후 탄력있는 콧망울에서 뛰어내려 비상했다
코끝에서 한 치 내려가 붉은 입술이 포개어져 있었다
입술은 살짝 들렸는데 힘은 배어있지 않아 부드러웠다
침이 꼴깍 하고 넘어갔다
그랬다
첫 눈에 반해 온 마음을 빼앗겨
한 눈에 너의 모든 걸 담을 수 있었다
너무 무례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 시선을 거두었다
문이 열리고 첫 자리 여자가 일어나 들어가자
네가 첫 자리로 옮기고 나는 방금까지 네가 있던 자리로 옮겼다
검은 모직 코트가 데우던 자리는 따뜻했고 나는 조금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원에 합격했다
대학원에서 가장 기대됐던 건 너였다
합격 발표일까지 네가 계속 떠올랐고
합격을 확인한 후에는 그리움은 고통이 됐다
다행히 너도 합격했다
망설일 수 없었다
첫 날 너를 확인하고는 인사했다
학교에 갈 때마다 너를 찾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공부했다
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하려 했다
오래 끌 인내심이 없었다
네가 솔로인 걸 확인한 후 "사귀자"고 말했다
너는 웃었다
큰 눈이 크게 휘어 또렷한 눈동자를 감추었다
강단있게 선 코 옆에 잔주름이 잡혔다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다
"안돼요. 난 너무 가난해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서너 번의 연애 경험도 있었고
수십 개의 연애담도 들어왔는데
가난을 이유로 거부당했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낯선 것은 배격하는 성격이었다
우격다짐으로 너를 설득해서 만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네가 언짢거나 부담스러울까봐 비싼 밥을 먹지도 비싼 선물을 하지도 않았다
우린 밥이나 금 없이도 배부른 연애를 했다
그 행복에 너의 가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에 망각했던 너의 가난을 처음 듣게 된 그날을 아직 기억한다
학기를 마친 기념으로 당시 인기 데이트 코스였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샐러드와 스테이크, 파스타를 주문하고 더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너는 늘 내 지갑이 열리는 것에 민감했으니 이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때 너의 눈은 메뉴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네 눈을 따라 가니 피자 카테고리였다
"피자가 먹고 싶어?"
-"아니." 너는 웃으며 말했지만 입꼬리는 피자가 매달린 듯 무거워 보였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을 해치우고 커피를 마셨다
"잘 먹었어요. 너무 고마워."
너는 머그잔 가장자리에 묻은 립스틱을 엄지로 지우더니 빛나는 눈동자로 네게 다가왔다
"치즈피자가 먹고 싶었어요."
중학교 때였어요
점심시간에 수다를 떠는데 애들이 치즈피자 얘기를 하는 거야
난 그때까지 피자를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애들이 치즈피자를 묘사하는데 너무 궁금한 거야
특히 치즈라는 게 팔보다 길게 늘어난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난 사실 그런 치즈를 먹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학교 끝나고 언니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언니도 궁금했나봐
같이 슈퍼에 가서 슬라이스 치즈를 샀어요
후라이팬에 식빵 깔고 치즈 올리고 양파와 가지, 고추, 호박 같은 걸 올렸어
식용류를 두르고 했으니 제대로 됐겠어요?
식빵 밑이 다 탔지만 우린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팔까지는 아니지만 손바닥만큼 늘어나는 치즈에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처음으로 너의 가난 이야기를 들었다
'가난 이야기'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미안하고 지독했던 현실이었다
너는 언니와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다
엄마는 언니 6살 네가 4살 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갔다
그래도 너는 다른 애들과 달리 피붙이 하나와 함께 남겨져서 나은 형편이라고 생각했다
고아원을 나오기까지 부러진 지우개 하나도 남들 볼까봐 바지 주머니에 숨겨야 했다고 한다
'가진 것' 없이 궁핍하게 살았지만 언제나 언니가 있으니 행복했다고 했다
그런 피붙이가 커가면서 아팠다
폐렴이 심해져서 학교도 잘 못가고 누워서 지냈다고 한다
내가 너를 만나던 그때도 언니는 네가 마련한 단칸방에 누워있었다
네가 늦지 않게 집에 가야했던 이유는 엄한 아버지의 통금이 아니라 여린 언니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던 걸 알고 너를 더 붙잡기 위해 버스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늑장을 부렸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네 가난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가난은 재채기처럼 숨길 수 없다
네 옷은 수수했고 유행을 따르지 않았으며 무채색이 많았다
유일한 악세서리는 시계였고 네 손을 잡았을 때 시계줄의 도금이 벗겨진 걸 봤다
그 생채기가 어린 네가 감당했을 가난으로 인한 마음의 생채기를 가득 품은 것 같아 가슴이 아렸다
네 가난을 알고 나는 너를 더 사랑하게 됐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너는 공부가 하고 싶어 힘들게 모은 돈을 어렵게 결정해 대학원에 온 아이다
며칠 고심 후 나는 네게 선언했다
"나는 너와 하고 싶은 게 많아.
네게 주고 싶은 것도 많아.
널 배려해야 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난 네가 조금만 이해해 준다면 우리가 더 즐거울 것 같아."
그때부터 너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돈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받아온 돈이 많았기에 남들 하는 건, 아니 네게 해주고 싶은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렸다
데이트 비용의 90% 이상을 내가 썼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10%마저 도맡고 싶었지만 너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양보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가을에 우리는 횡성으로 학회를 갔다
눈치 있는 동기들이 우리 둘에게 저녁시간을 양보했다
우린 한우를 먹으러 갔다
너는 등심과 안심을 한 점씩 먹고
젓가락을 놓고 입 안에서 고기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씹었다
마지막 침을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마시자
너의 큰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나 한우 처음 먹어 봐요.
나 지금 너무 억울해서 우는 거예요.
너무 맛있으면 눈물이 난다지만,
너무 맛있기도 하지만 이건 억울해서 나는 눈물이야.
뭐가 억울한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 지금 눈물나게 억울한 심정이에요."
우린 석사가 마칠 때까지
등심처럼 기름지고 달콤하게
안심처럼 믿음직스럽게 사랑했다
석사 졸업을 앞두고 너는 굴지의 대기업에 단번에 합격했다
나는 해외 유학을 준비했다
첫 월급을 탄 너는 나를 고급 레스토랑으로 불러냈다
너는 스테이크를 시키고 와인도 한 병 주문했다
선물이라며 테이블에 종이백을 올렸는데
빈폴 남방과 면바지였다
내가 평소 빈폴을 많이 입고 다녀서 샀다고 한다
빈폴 매장을 처음 가봤고 옷감이 확실히 다른 것 같다며 웃었다
"언니에게 한우를 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언니가 아파서 외식을 못해요
그래서 제가 언니에게 뭘 해줬는지 알아요?
식빵치즈피자를 만들어줬어요!
슬라이스치즈가 아니라 모짜렐라치즈를 가득 올려 아주 부유한 치즈피자를 해줬어요.
언니가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몰라요."
그때 네가 얼마나 예뻤는지 나는 네게 끝내 말 못했다
그 웃음을 마지막으로 너는 다음날 내게 헤어지자고 고했다
대기업 월급으로 나와 즐겁게 데이트할 생각에 지난 한 달이 너무 행복했었단다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이때 나는 해외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당신은 정말 나와 급이 안 맞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당신에게 멍에가 될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어쩌면 그 말을 내가 먼저 준비했을 수도 있다
첫눈에 반하고 2년 후의 내 마음은 예전같지 않았다
유학을 준비하면서부터 마음은 눈부신 캘리포니아로 이미 넘어갔었다
떠나기 전 날 집 근처에서 만났다
서로에게 누구나 할 수 있는 덕담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잘 지내. 건강해. 넌 잘 할 거야. 고마웠어
둘 다 같은 말들을 했던 것 같다
내 손에 고이 접은 편지를 남기고 너는 돌아섰다
가로등을 지나 사라지는 너를 보내고 반대로 걸었다
가로등에서 조금 비켜선 벤치에 앉아 네 편지를 열었다
편지가 아닌 시였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눈물이 터져나왔다
등심을 씹던 너의 심정도 이랬을까
나는 왜 이런 참맛을 모르고 살아왔던 걸까
이렇게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왜 너를 보내고 알았을까
내게 사랑은 이렇게 큰 것인데 나는 무얼 위해 너를 안 잡는 것일까
나는 네게 연락 없이 떠났다
너는 이미 모든 것을 버렸고 그 고통마저 버리고 있을테니.
유학 중에도 너의 소식은 간간이 들려왔다
너와 같은 팀에 대학 동문들이 있어서 전해졌다
헤어지고 1년 뒤에 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4년 뒤에 너는 이유를 알리지 않고 사직했다고 한다
너는 나와 다른 대학 출신이고 대학원 모임에 나오지 않기에 더 이상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네가 잘 살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로를 위한 길이라며 나만을 위한 길을 떠났습니다
어리석었고 후회하지만 그런 생각마저 당신은 허락하지 않을 거란 걸 압니다
나를 보내준 당신에게 보답하기 위해 나의 길을 열심히 걸어왔습니다
이 정도 계절에, 볕이 창을 넘어 가득 들어올 때 당신 처음 본 그 날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세상에 담대한 빛을 던지던 그 예쁜 눈으로 지금도 안녕하신가요?
아직도 나를 기억한다면 나를 용서해 주세요."
(여행스케치, <옛 친구에게> 가사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