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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잌 Mar 22. 2023

인생을 뒤바꾼 단 한 번의 선택 같은 건

[마흔로그] 오늘도 선택이 어려운 당신에게

마흔에 마주한 인생의 질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신나게 흔들리고 방황하는 중년의 일상을 나누는 뉴스레터 <마흔로그>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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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0년쯤 전에(!!)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유행을 했어요. 매 회차마다 주인공은 삶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선택의 순간에서 고민을 합니다. 마침내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치며 하나의 길을 고르는데요, 각각의 선택에 따라 인생이 어떻게 바뀌는지 극으로 꾸며 보여주는 프로였어요. 


내 선택에 확신이 없을 때, 혹은 잘한 선택이라는 안도감이 필요할 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가 궁금하잖아요. 현실에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그 반대편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이휘재의 인생극장>에는 있었어요. 


가끔은 ‘문이 닫히는 지하철을 달려가서 탈 것인가, 다음 열차를 기다릴 것인가’와 같은 사소한 선택에 따라 주인공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보고 뜨악하기도 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법한 중요한 결정에서 뭘 선택하든 나름의 만족스러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안도하기도 하고요.


이휘재가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치는 순간의 배경음악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저는 ‘인생을 뒤바꾼 선택의 순간’이라는 이미지에 단단히 꽂혀 버렸습니다. 인생이 실제로 <인생극장>처럼 흘러간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선택의 순간마다 제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래, 결심했어!’ 따위를 외치지는 않을 테고, 인생의 선택지는 극에서보다 훨씬 복잡하겠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의 옳은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종종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 선택 앞에서 얼어붙곤 했습니다. 특히 ‘손에 쥔 것을 놓고' 해야 하는 의사결정에는 더 그랬죠. 살아온 기간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잘못된 선택에 대한 부담은 점점 커졌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저는 다음 10년을 위한 ‘인생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부담에 사로 잡혔었어요. 그 정도로 큰 일을 저질렀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이 한 번의 선택이 앞으로 10년의 인생을 좌우할까 봐 겁이 나서 선택이 꺼려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벌벌 떠는 것 치고는, 딱히 두고두고 후회되는 ‘잘못된 선택'을 한 기억이 없어요. 물론 이불킥을 하고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은 순간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인생이 어쩌다 지금 이 길로 흘러들었을까 뒤돌아 볼 때, 콕 집어 '이것 때문이구나'라고 특정할 수 없을 때가 많거든요. 


어쩌면 인생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의도적인 선택을 해서 이렇게 되었다기보다는 너무 사소해서 인식조차 못하는 수백 개의 결정이나, 혹은 어떤 의사결정도 내리지 않은 채 흘려버린 순간의 결과물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인생극장에서와는 다르게 현실에선 선택의 순간들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은 더 지나갑니다. 실상은 ‘그래! 결심했어!’라기보다는 ‘그래! 결심했어! 아닌가? 바꿨어! 또 결심했어! 결심했고! 또 했네! 또 하고! 또 하고! 뭐야 이 결정은 누가 했어?!’에 더 가깝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의 선택에 대해 이게 옳은 결정인가 그른 결정인가를 두고두고 곱씹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인생을 뒤바꾼 순간의 선택’이니 하는 말들 때문에 선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요. 그래서 선택의 순간마다 불안해하고,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책하고 후회하면서 많은 날들을 괴로움 속에서 보내는 건 아닐까요?


선택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지금 눈앞에 놓인 그 하나의 결정에 지나치게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거죠. 하나의 옳은 선택이 아니라, 수 천 수 만의 ‘나 다운’ 선택이 쌓여 비로소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는 것 같아요. 반복해서 같은 방향으로 내리는 결정이 길을 다지는 것이지, 어떠한 결정도 단 한 번만에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해야 할 일은, 눈앞에 놓인 선택이 실패하진 않을까 걱정하느라 제발 누가 아무거나 좀 정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랄 게 아니라(그러는 중입니다…), 앞으로 올 수많은 결정을 잘 해낼 수 있는 ‘좋은 선택을 하는 나’를 길러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뭐든 직접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했던 마음을 들여다보고, 저만의 기준을 만들고, 선택 이후의 일들을 책임지는 것. 선택은 그 결과보다 ‘선택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건지도 몰라요. ‘인생을 뒤바꾼 단 한 번의 선택' 같은 것에 사로잡히지 말고, 수 천 수 만의 선택들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가면 되는 거예요. 


이번 판은 망했나요? 바로잡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곧바로 다시 올 거예요. 수십 번도 더 올 거예요. 계속계속 올 거예요. 지겹도록 많이 올 거니까, 지겹도록 많이 많이 선택을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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