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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찬 Jan 02. 2019

[단편소설] 메이플

 압박대 밑으로 푸르스름한 정맥이 미세하게 부풀어 올랐다. 조금 따끔할 거야, 라고 얘기하며 나는 채혈용 바늘의 포장을 뜯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붉은 소독약이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바늘의 사면이 피부의 무기력한 저항을 통과하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메아리쳤다. 선홍색 피가 라인을 타고 혈액백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반창고로 그녀의 팔에 바늘과 라인을 고정시킨 뒤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안락사를 기다리는 병든 유기견처럼 묵묵히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고 있었다. 저 앙상한 몸에 아직도 빠져나올 피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었다.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거야. 나는 그녀의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가끔 정적이 너무 길어질 때면 그녀의 코에 뺨을 대어보았다.


 오늘로 벌써 열 번째.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그녀의 몸에서 꾸준히 피를 뽑았다. 최소한의 휴식기간도 지키지 않은 무리한 채혈이었다. 혹시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지. 피를 뽑을 때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녀가 사망하고 경찰이 들이닥친다면? 소파 위에는 그녀의 야윈 시체가 놓여있고, 팔뚝에서는 이제 막 응고되기 시작한 혈액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경찰은 냉동실에 수북이 쌓인 혈액백을 발견하고는 경악하겠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한다 한들 경찰이 믿어주기는 할까? 나는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신문의 첫머리를 장식하게 될 지도 모른다. “피를 뽑아 친구를 살해한 사이코패스” 같은 무시무시한 제목과 함께. 기자들은 나의 유년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오래전 헤어진 양부모나 어릴 적 친구를 찾아내어 나에 대해 꼬치꼬치 묻고는 소설 같은 이야기로 지면을 채울 것이다.


 머릿속의 근심처럼 조금씩 차오르던 혈액백은 이내 팽팽해졌다. 나는 조심스레 바늘을 뽑은 뒤 혈액백을 밀봉했다. 이제 막 그녀의 몸을 빠져나온 피에는 아직 생명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냉동실 가장 아래 칸에 혈액백을 밀어 넣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하얀 냉동실이 굶주린 짐승의 뱃속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이 내가 처음으로 ‘용서’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날이었다는 사실만은 아직 기억에 또렷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간호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을 선택했다. 대학에서 새롭게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넌 어디서 왔니?”라고 물었다. 한국인 학생은 고사하고 동양인 학생도 찾아보기 힘든 학교였으니 친구들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나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극히 평범했을 그 질문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짙은 검은색 머리는 “한국”이라고 대답할 것을 종용했지만, 나는 한국에서 있었던 어떤 일도 기억하지 못했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있는 바도 없었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나는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대처하며 곤란한 상황을 모면했다. 어떤 때는 “지구라는 별에서 왔어”라고 웃으며 답했고, 가끔은 입술에 검지를 붙이며 “비밀”이라고 속삭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국과 한국 사이에 놓인 태평양의 어느 지점 위를 부표처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며 양부모와 떨어지기 전까지 나는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한국에 대한 나의 관심이 양부모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좌절에 빠트렸다.


 언제까지나 한국을 회피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건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졌다. 결국 나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한국에 대해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교환교수로 와있던 한국인 교수가 한국사 수업을 개설한 것도 나를 부추겼다.


 교수는 첫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챙기던 나에게 다가왔다. 아마 적지 않은 수강생 중에 내가 유일한 동양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도 다른 친구들처럼 내가 어디서 왔는지부터 물었다. 나는 코를 찡긋하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부터 그걸 알아보려고요.”


 수업은 유익하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도 유독 가난했을 엄마의 삶은 수업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만들어진지 천년이 넘었다는 정교한 왕관이나 우아한 도자기 속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강의가 회를 거듭할수록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교수는 한국전쟁에 대해 강의했다. 평소에는 한국인 교수의 어눌한 영어 발음을 흉내 내던 짓궂은 친구들도 그날만큼은 진지하게 수업을 경청했다. 수강생 대부분은 한국전쟁 때 친척이나 이웃을 잃은 아픈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이름의 작은 나라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곳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교수는 학생들의 이런 바람을 간파했다. 미군의 영웅적 서사를 담은 흑백 슬라이드가 쉬지 않고 스크린 위에서 흘러갔다. 총을 든 미군은 용맹스러웠고,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거나 야구를 가르치는 그들의 모습에는 인간미가 넘쳤다. 친구들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교수는 한 소녀의 모습이 담긴 슬라이드를 스크린에 띄웠다.


 열 살이나 됐을까.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녀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피난민의 행렬 속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메라를 돌아보고 있었다. 깍지 낀 손으로 등에 업힌 동생의 엉덩이를 받친 채.


 소녀가 마지막으로 끼니를 챙겨먹은 건 언제일까? 밤에는 처마 밑에서 이슬이라도 피하고 있는 걸까? 조금 떨어져 걷고 있는 중년 여자가 소녀의 엄마가 맞겠지? 꼭 그래야 하는데…. 설마 동생이랑 단 둘 뿐인 건 아니겠지? 주파수가 맞지 않은 라디오처럼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서 지지직거렸다.


 꼬리를 물던 생각은 ‘혹시 저 소녀가 내 엄마가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슬라이드를 응시하던 두 눈에서 폭발하듯 눈물이 터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눈물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고아인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나는 늘 생각했었다. 엄마가 교통사고나 몹쓸 병 같은 걸로 세상을 떠났더라면, 최소한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나의 생물학적 엄마는 나를 버렸고, 그건 언제까지나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내 생명의 근원을 증오해야하는 모순적 상황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바로 그날, 그 슬라이드 속 소녀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를 용서할 수 있었다.


 슬픔과 기쁨이 묘하게 교차하던 그날 저녁 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노인복지센터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다. 운영과 직원은 새로 온 자원봉사자라며 그녀를 나에게 소개했다. 눈에 띄게 예쁘지는 않아도 잔잔한 눈매와 통통한 볼이 매력적인 친구였다. 수줍음 많은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보조개가 마법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나의 검은 머리를 보고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엄마가 그녀를 보낸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밤새 생각했다.


*


 의사는 깐깐해 보이는 은발의 백인 남자였다. 구김 하나 찾을 수 없는 가운 사이로 스카이 블루 셔츠와 인디고 타이가 세련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가운이 아니라 양복을 입었다면 의사보다는 은행원이 훨씬 어울릴법한 인상이었다. 그녀가 맞은편 의자에 앉자 의사는 새로 출시된 예금상품을 안내하듯 조직 검사 결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걱정한대로 그녀는 유방암이었다.


 이미 폐와 대장까지 전이가 이루어져 수술로 제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긴장으로 팽팽하던 이성의 끈이 한순간에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무릎 위에 올려둔 핸드백을 꽉 움켜쥐어야 했다.


 정작 암을 선고받은 그녀는 태연했다. 그녀가 지나치게 차분했기 때문인지 의사는 이 동양인 여자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의사는 중간 중간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에게는 앉아있는 일조차 버거웠다. 의사는 결국 자신의 진단을 “브레스트 캔서(breast cancer)”와 “트웰브 먼쓰(twelve month)”라는 두 개의 문장으로 압축해서 전달했다. 그녀가 동요하지 않자 의사는 더 또박또박한 발음과 더 큰 목소리로 요점을 반복했다. 의사의 말이 악마의 저주처럼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견디다 못한 나는 책상 모서리를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니 이제 제발 그만해 달라고 부탁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입술을 적셨다. 의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조금 전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모든 것이 한편의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졌다.


 티타늄 빛깔의 병원 엘리베이터는 시체 안치실의 육중한 철문을 연상시켰다. 그녀는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셀프’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셀프(Self)? 마크 퀸(Marc Quinn)의 셀프?”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셀프를 본 것은 영국으로 휴가를 떠났던 2010년 여름이었다. 그해 봄, 나는 3년 넘게 키우던 반려견 샘을 잃고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상실의 늪에서 침전하고 있었다.


 샘은 원래 이웃집 할아버지가 키우던 골든 리트리버였는데, 처음부터 입양할 생각으로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이웃 주에 사는 아들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가면서 나에게 녀석을 부탁했다. 이따금 고장 난 울타리를 고쳐주거나 지붕 청소를 도와주시던 분이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연휴 동안만’이라는 단서를 달아 샘을 맡았다. 아들집에 머물던 할아버지는 가벼운 감기가 폐렴으로 번지면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그 바람에 샘과 나는 뜻하지 않게 가족이 되었다. 양부모로부터 독립한 후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 건 녀석이 처음이었다.


 샘은 먹성이 좋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밥그릇 앞으로 총총 걸어가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 표정이 너무 귀엽고 측은해서 녀석의 사료를 챙겨주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침대에서 빠져나올 때면 나는 늘 침대 옆에 놓인 슬리퍼부터 신었는데, 영민한 녀석은 이걸 눈치 채고는 내가 늦잠을 자는 날이면 슬리퍼를 얼굴 위에 물어다 두고 뺨을 핥았다. 나는 녀석의 축축한 혀를 피하려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이내 알겠어, 라고 애정이 섞인 짜증을 내며 슬리퍼를 신곤 했다.


 녀석이 세상을 떠난 이후 나는 눈을 뜨자마자 집에서 빠져나왔다가 잠들기 직전에야 돌아갔다. 아침에는 간호사로 근무하는 병원에서 끼니를 해결하거나 조깅을 하고, 밤에는 혼자서 영화를 보거나 쇼핑센터를 배회했다.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볼 때마다 녀석의 부재가 떠올라 견디기 어려웠다. 다가오는 여름휴가 동안 집에 머무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영국 여행을 제안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영화를 보러 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맞장구치듯 가볍게 승낙했다. 근데 왜 하필 영국이야, 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번 물었을 뿐이다.


 비틀즈와 셰익스피어의 나라잖아, 라고 나는 에둘러 대답했다. 샘이 늘 물어다주던 슬리퍼에 영국 국기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여행은 순조로웠고 우리는 생각보다 잘 지냈다. 긴 여행에서 친구를 잃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리는 선을 넘지 않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상대가 쳐놓은 마음의 울타리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예의를 지켰고, 상대방의 작은 실수도 지적하지 않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와 국립 초상화 미술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마지막 목적지를 모두 미술관으로 정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나와는 달리 미술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조명 아래 놓인 그림이나 조각보다는 생기 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편이 즐겁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시장에서 물건을 팔거나 거리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쳐다보곤 했다.


 빡빡한 일정 탓인지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도착한 그녀는 눈에 띄게 피곤해 보였다. 나는 금방 둘러보고 오겠다며 지하 카페에 그녀를 남겨 두고 혼자 전시실로 올라갔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곳이라 꼼꼼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혼자서 기다리는 그녀가 마음에 걸려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절반도 둘러보지 못하고 카페로 돌아갔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서둘러 내려 올까봐 나를 찾아 전시실로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때마침 마감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출구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거스르며 그녀를 찾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가 한산해진 어느 전시실에 그녀는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그녀가 무언가에 압도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앞에는 한 남자의 붉은색 두상이 놓여있었다. 영국의 작가 ‘마크 퀸’의 작품 ‘셀프’였다. 마크 퀸은 6개월 동안 자기 몸에서 4.5리터의 피를 뽑은 다음, 자신의 머리를 본뜬 몰드(mold) 안에서 그 피를 냉동시켜 작품을 완성했다. 피가 녹아내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작품은 영하 18도를 유지하는 유리관 안에서 냉동 보관되고 있었다. 무명의 젊은 예술가였던 마크 퀸은 자신의 피로 만든 이 실험적인 작품 덕분에 일약 영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


 물론 셀프는 훌륭한 작품이었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그녀가 버지니아 울프나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도 아니고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전위적인 작품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다소 의아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작품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전시실 안에는 어느새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얼마 뒤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다가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양쪽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그녀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흠칫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나온 건 마지막 밤 호텔 근처 펍(pub)에서 찍은 사진뿐이었다. 주목받기 싫어하는 성격 탓인지 그녀는 사진에 찍히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창밖의 구름을 지켜보던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았다.


 “글로리아, 미안하지만 어젯밤에 나와 찍은 사진, 지우면 안 될까?”


 “너와 함께 찍은 사진은 이거 하나뿐이잖아. 한 장 정도는 괜찮지 않아?”


  나는 실망을 표시하려고 과장되게 입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이것마저 없으면 너와 함께했던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어?”


 그녀는 말없이 카메라를 가져가 한 장씩 사진을 넘기며 말했다.


 “글로리아, 사진만 보면 이번 여행이 정말 행복해 보인다. 돌이켜보면 힘든 순간도 많았는데 말이야. 리버풀에서는 기차를 놓칠까봐 점심도 못 먹고 숨이 넘어가도록 뛰었던 거 기억나? 맨체스터에서는 발에 물집이 잡혀서 둘 다 절룩거리고 다녔었잖아. 하지만 사진으로만 보니까 여행 내내 행복했던 것 같네. 시간이 흐르면 힘들고 지루했던 순간들은 휘발되어 날아가겠지? 넌 사진에 찍힌 행복한 순간들로만 이번 여행을 기억하게 될 거야.”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글로리아. 내가 왜 사진에 찍히는 걸 싫어하는지 알아? 내게는 사진으로 남길만한 행복한 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의 부탁이 진지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카메라를 건네받아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눌렀다.


*


 그녀와 내가 봉사활동을 하는 노인복지센터에서는 가을마다 후원행사가 열렸다. 그해에는 행사를 코앞에 두고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직원이 그만두는 바람에 그녀와 내가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주요 참석자들의 명찰을 만들고, 축하공연을 위해 찾아온 어린이 합창단에게 선물을 챙겨주고, 노인들이 간식으로 먹을 커피와 도넛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정리를 마무리한 우리는 센터 앞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커피가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조금 전까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북적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왔지만 성취감이 동반된 기분 좋은 피로였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위로하듯 우리를 스쳐갔다.


 같이 일하며 지켜본 그녀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초청장이나 후원 요청서 같은 의례적인 문서에서도 그녀의 문학적 재능은 빛을 발했다. 그녀의 글에는 어린아이의 애절한 눈빛처럼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녀 덕분에 후원금은 크게 늘었고, 빠듯했던 센터의 살림살이에도 숨통이 트였다.


 “넌 왜 직업을 갖지 않는 거야? 여기서 봉사활동만 하기에는 네 재능을 너무 낭비하는 것 같은데. 물론 이것도 충분히 보람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행사를 준비하며 부쩍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내가 물었다.


 그녀는 결혼이나 취업, 학문적 성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아빠의 돈을 축내며 하루하루를 허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라는 것이었다.


 “뭐, 아빠에 대한 복수라고?”


 나는 그녀의 입에서 뜻밖에 튀어나온 ‘복수’라는 단어에 놀라 반사적으로 물었다.


 “애기하자면 좀 길어. 미국에 건너 온 이후로 누구에게도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 오늘밤 너에게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그녀가 어두워진 센터의 정원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사소한 계기로 감정이라는 심지에 불이 붙어 기억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비밀의 응어리가 폭발하는 날 말이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가 뇌관까지 타들어 가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그녀는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과연 비밀을 공유할만한 사람인지. 비밀을 고백하려는 자의 어색한 침묵을 견디는 자만이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합격을 통보하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글로리아, 넌 갓난아이 때 미국으로 입양됐으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를 거야.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어. 하지만 나는 중산층 가정에서 별다른 부족함 없이 자랐지. 아빠는 공무원이셨는데, 엄마도 아빠가 공무원이라고만 말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몰랐어.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야 아빠가 정보기관에서 일한다는 걸 알게 됐지.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나라가 많이 혼란스러웠어. 학생과 경찰은 매일같이 싸웠고, 최루탄 때문에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지. 반복되는 휴교령으로 수업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많았어. 경찰이 강의실에 들어와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을 잡아가는 일도 있었지.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하루는 현대소설론 수업에 들어갔어. 꼬장꼬장한 노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 과목이었지. 너희들이 세상을 바꾸려면 데모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분이었어. 교수님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평소처럼 출석을 부르셨지. 교수님이 한 친구의 이름을 부르자 강의실 전체가 숙연해졌어. 며칠 전에 공대에 다니던 학생 하나가 쫓아오는 경찰을 피하려다 학생회관 옥상에서 실족사한 사건이 있었거든. 교수님은 미처 모르고 그 친구의 이름을 불렀던 거야. 여학생 몇 명이 소리죽여 흐느끼기 시작했고, 학생 몇 명은 조용히 가방을 싸서 강의실을 빠져나갔지. 교수님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셨나봐. 강의를 시작하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교수님은 갑자기 몸이 좋지 않다며 수업을 마치셨어. 그 이후로 다시는 출석을 부르지 않으셨지.


 나는 그런 시대에 살았어. 학생인데도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다는 게 부끄러운 시절이었지. 나의 유일한 낙은 소설을 읽는 거였어. 그래서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지. 당시 대부분의 동아리들은 간판만 걸어뒀을 뿐 학생 운동을 하는 조직이었어. 경제학 연구회나 농촌 연구회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검도부나 유도부 같은 동아리도 간판만 걸어두고 주체사상이며 마르크스를 학습했지. 내가 속한 문학 동아리는 이름 그대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동아리 중 하나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처럼 귀하게 자란 애들만 모여 있었던 것 같아.


 문학 동아리에서 한 학년 선배였던 그를 처음 만났어. 깊고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지. 나는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느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어. 그는 뭔가 달랐거든. 그게 가난의 흔적 때문이라는 건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됐지.


 선배들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못했어. 매년 여름마다 여러 대학이 참여하는 토론대회가 열렸거든. 학교 대표로 내보내기에 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었지. 그 사람 덕분에 학교는 매번 좋은 성적을 거뒀어.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초월했지. 단순히 책만 많이 읽은 게 아니라 통찰력도 뛰어나고 문장도 좋았어. 신입생 때부터 잡지에 서평을 기고해서 생활비를 마련할 정도였으니까.


 어느 늦은 가을날 도서관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를 보았어.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앞에 멍하니 서있더라고.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넓은 어깨 덕분에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지. 나는 여자들만 다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또래 남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어. 대학에 입학하고도 혹시 어색한 상황에 처할까봐 남자 선배나 동기들은 모르는 척 피해 다녔지.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은 그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더라고. 마치 오늘처럼.


 바람이 매서운 날이었는데도 그는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고 있었어.


 “선배, 춥지 않아요? 옷도 안 입고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요?”


 그는 나를 보며 웃었어. 깊고 은은한 눈이었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


 “이 단풍 한번 봐봐. 줄기부터 잎사귀 끝까지 틈새하나 없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잖아. 마치 불타오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이 나무를 보고 있으면 마치 모닥불 옆에 있는 것처럼 따뜻해.”


 돌이켜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얘기였는데, 나는 그 말 한마디에 사랑에 빠졌어. 어쩌면 오랫동안 그를 사랑할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어. 그해 겨울 그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고향 선배를 자기 하숙방에서 재워줬다가 경찰에 연행됐고, 나한테 전화 한 통 하지 못하고 군대로 끌려갔거든.


 아빠는 학교 사찰을 담당하던 후배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는 나에게 당장 미국으로 떠나라고 명령했어. 내가 떠나지 않으면 그가 나를 떠나도록 만들겠다고 했지. 나는 아빠가 그렇게 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이곳에 오게 된 거야.


 비밀을 쏟아낸 그녀는 이제 막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톤 선수처럼 지쳐 보였다. 나는 한참 전에 바닥난 커피잔을 들어 천천히 입술에 기울였다. 그녀에게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 내가 생각해 낸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설픈 위로나 동정의 말은 오히려 상처가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에 나는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어느새 그녀의 어깨 너머로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


 “꼭 머리를 자를 필요는 없어. 머리를 뒤로 묶은 다음 그 위로 비닐 캡을 씌워도 된다고.”


 나는 날이 번득이는 미용가위를 집으며 그녀의 의사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아니, 아무래도 자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머리카락 위로 캡을 씌우면 뒤통수가 엄청나게 부풀어 오를 거 아냐? 내가 무슨 외계인처럼 보이면 어떡해?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선물이니까 되도록 내 모습에 가깝게 만들고 싶어.”


 그녀의 대답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어깨 근처까지 내려온 그녀의 왼쪽 머리를 한 움큼 쥐었다. 쓱쓱, 생기를 잃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잘려나가자 차양을 잃은 그녀의 광대뼈가 더 도드라졌다.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 그녀의 볼에서 꽃처럼 피고 지던 보조개를 떠올렸다.


 삐뚤빼뚤 머리가 잘려나간 그녀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그녀가 거울을 보기 전에 남겨진 머리를 밀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그녀가 바리캉이라고 부르던 헤어 클리퍼의 전원을 켰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격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날짐승을 억지로 움켜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뒷머리에 가만히 기계를 대어보았다. 벚꽃이 날리듯 짧은 머리카락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글로리아, 마크 퀸이 만든 셀프가 한 개가 아니란 건 알고 있어?”


 클리퍼의 소음 때문인지 그녀는 의식적으로 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지만, 그녀의 머리에 상처라도 날까봐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마크 퀸이 처음으로 셀프를 만든 건 1991년이었는데, 그 후로도 5년마다 새로운 셀프를 만들었대. 각각의 셀프는 그 당시 마크 퀸의 머리를 본뜬 틀 안에 새로 뽑은 피를 냉동시켜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고. 그런 식으로 1991년부터 2011년까지 총 5 점의 셀프가 만들어졌대. 청년 셀프부터 중년 셀프까지. 흥미롭지 않아?”


 그녀의 머리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녀가 불안해 할까봐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어. 2009년 여름에는 스위스 바젤에서 4 점의 셀프가 함께 전시되는 행사도 열렸었다고 하더라고. 한자리에 모인 작품들끼리 무슨 얘기를 했을지 궁금하던데? 중년의 셀프가 청년 셀프한테 ‘이봐, 자네. 나이 들면 고생하니까 술 좀 적당히 마시는 게 좋을 거야’ 같은 조언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더 젊고 건강할 때 작품을 미리 만들어 둘 걸 그랬나봐.”


 나는 가만히 클리퍼의 전원을 내렸다. 갑작스런 고요 때문인지 방안의 공기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가발을 씌우면 어떨까. 머리카락이 없으면 그가 널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잖아. 얼굴이 붉은색이니까 검은색 가발은 어울리지 않겠지? 그럼 금색이나 갈색 가발은 어떨까?”


 나는 잘못을 감추기 위해 엄마의 주의를 돌리려는 어린아이처럼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마지막 작업을 앞두고 우리는 작은 문제에 봉착했다. 그녀의 머리를 본뜬 몰드를 집어넣기에는 가정용 냉장고가 너무 작았다. 식당이나 병원에서 사용하는 대형 냉장고가 필요했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노인복지센터 창고를 이용하기로 했다. 창고는 센터에서 사용하는 의약품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간호사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와서인지 뭔가 수상하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경비원에게는 그녀가 분기마다 이루어지는 의약품 재고점검을 도와주기 위해 함께 왔다고 둘러댔다.


 나는 창고 문이 잠겼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백팩에 담아온 혈액백들을 책상 위에 꺼냈다. 매끈한 표면위로 자잘한 물방울들이 이슬처럼 맺혔다. “모자 벗고 편하게 앉아.” 나는 어젯밤 마트에서 구입한 방한용 비닐을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검은색 비니 모자를 벗고 어색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내 머리 어때, 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나는 말없이 그녀의 목에 비닐을 둘렀다. 실리콘이 굳기 시작하면 작은 실수라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실리콘 틀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녀를 세심하게 배려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나는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머리카락이 사라진 그녀의 머리는 미용 실습을 위한 마네킹처럼 삭막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얇은 비닐 캡을 씌운 다음 가장자리에 접착제를 발라 고정시켰다. 그녀의 눈썹과 속눈썹에는 꼼꼼히 바셀린을 발랐다. 응고된 실리콘 틀을 분리하다가 뽑혀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초 준비를 마친 나는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구별된 실리콘 용액을 꺼내어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서 섞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녹색으로 변한 실리콘 용액이 밀가루 반죽처럼 끈적거렸다. 나는 주름이 많아 모양이 나오기 어려운 귀에서부터 시작해 코를 제외한 얼굴 전체에 실리콘을 발랐다.


 “숨쉬기 어려우면 오른손을 들어.”


 마지막으로 그녀의 코에 실리콘을 바르며 내가 말했다.


 다행히 호흡이 힘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뒤덮은 녹색 실리콘 위로 서둘러 석고 붕대를 감았다. 붕대에 감긴 그녀의 마른 얼굴은 이미 오래전 생명을 잃어버린 미라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방한용 비닐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야윈 손이 불규칙하게 떨렸다. 차가운 실리콘 때문인지 창고의 한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20분이 경과했음을 알리는 셀 폰 타이머가 적막을 갈랐다. 나는 석고 틀을 해체한 뒤 실리콘 틀을 조심스럽게 잘라 그녀의 머리에서 분리했다.


 “이제 끝난 거야?”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이제 다 끝났어. 많이 답답했지?”


 나는 실리콘 틀이 제대로 떠졌는지 구석구석 살피느라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출입문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서웠어. 눈앞에서 흘러내리는 실리콘이 마치 내 시신 위로 쏟아지는 흙처럼 느껴졌어.”


 나는 그녀의 머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광대뼈가 오른쪽 뺨을 찔렀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는 몰드 안에서 피가 냉동되기를 기다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나중에 그가 너를 원망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랑했다면서 왜 지금까지 숨어 있었냐고. 죽기 전에 웃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고. 피로 만든 두상 말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네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고. 그가 나까지 원망하면 어쩌지? 내일이라도 당장 그를 찾아보면 어떨까. 요즘에는 전문적으로 사람을 찾아주는 서비스도 있다던데. 이메일이나 전화 한 통이면 내일 당장이라도 그가 달려올지 모르잖아.”


 “글로리아, 내가 지금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알아?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보다 두려운 건 그가 나를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야. 그를 마지막으로 본지 벌써 30년도 넘었잖아. 가끔 그럴 때 있지 않아? 오래된 일기장이나 앨범을 들쳐보다가, 아 맞다, 그때 이런 친구도 있었지, 하며 놀랄 때. 그가 내 이름을 듣고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갑자기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거나, 내 얼굴을 보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나를 알아보고는 놀라지 않을지, 그게 두려워. 요즘 밤마다 그런 악몽을 꿔.”


*


 그녀의 두상은 개인이 소장한 아담한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24시간 내내 냉동 상태를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을 고려해서 작품은 대가없이 기증됐다. 마크 퀸의 작품을 흉내 낸 한국인 여자의 두상은 지역신문에 짧게 소개되었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 사람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작품이 전시된 날부터 나는 그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일은 예상보다 쉽게 풀렸다. 대학 총동문회를 통해 그의 회사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꽤 규모 있는 문학 전문 출판사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 썩 어울리는 자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가 갤러리에 찾아온 것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쌀쌀한 날이었지만 재정이 열악한 갤러리라 난방은 가동되지 않았다. 나는 자동차 히터로 덥혀졌던 재킷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지퍼를 올렸다.


 그녀의 작품 앞에 한 남자가 전시실을 밝히는 조명처럼 서 있었다. 셀프를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이 겹치며 가슴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늘 말하던 것처럼 넓은 어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외투를 벗어 왼팔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이 작품에 쏟았습니다.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작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당신이 글로리아군요, 같은 의례적인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첫 만남인데도 검은색 뿔테안경을 쓴 그가 오랜 친구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짧지 않은 적막이 흐른 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작품이 완성되어 갈 무렵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아름다운 석고상이나, 꽃밭에 앉아있는 초상화도 아니고, 왜 하필 이 징그러운 두상이냐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당신이 찾아오면 해답을 알려줄 거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나는 30년 넘게 그녀와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녀의 팔에서 피를 뽑고, 그녀의 머리를 깎고, 비린내를 참아가며 몰드에 피를 부은 것도 나였습니다. 물론 그녀의 임종을 지켜본 것도. 그녀가 그런 나에게조차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는 게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을 직접 만든 나도 알지 못하는 해답을 당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이었는지도 모르죠.


 나는 나름의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이 고통스러운 작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웠으니까요. 마크 퀸이 처음으로 셀프를 만들었을 때, 그는 알코올 중독이었다고 하더군요. 알코올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태였던 거죠. 냉동장치에 의존하지 않으면 피가 녹아내려 셀프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혹시 그녀는 당신의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짐작만 해보았습니다.


 그녀의 죽음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오자 이런 걸 고민할 여유조차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죽은 뒤에 당신을 찾지 못하면 어쩌지, 당신도 이미 죽었거나, 그녀를 기억조차 못하면 어쩌지. 이런 걱정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나를 외딴 나라로 보내버린 생모나 내가 떠나온 양부모처럼 당신과 그녀도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 밤마다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당신을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보리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알고 있나요? 그녀가 사멸하는 별처럼 바스러지는 순간에도 왜 이 작품을 그토록 고집했는지?”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작품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 것 같군요. 그녀가 왜 이 작품을 남기고 싶어 했는지. 이제 내 대답이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건 아마, 그녀의 몸에 흐르던 붉은 피가 우리가 사랑했던 단풍의 빛깔을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Marc Quinn, Self, 2001, Image: The Art World 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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