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병찬 Jul 31. 2017

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인간은 어떻게 조직에 종속되는가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이하 '복종 실험')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심리학 실험 중 하나다. 영화와 다큐로도 만들어졌고 유대인 학살이나 기업 범죄 등 조직적 범죄를 다루는 경우에도 자주 인용된다. 복종 실험이 미디어에서 자주 언급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해당 실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건 영화의 예고편만을 보고 영화 전체를 봤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물론 예고편이 전부인 영화도 있겠지만, 예고편만 보고 감독의 세계관을 이해하기는 어려우며, 건 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탠리 밀그램이 진행했던 복종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험한다며 참가자를 모집한다. 두 명의 참가자가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은 '선생' 역할을, 다른 사람은 '학생' 역할을 맡는다(실제로는 제비가 조작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참가자는 무조건 선생 역할을 맡게 되며, 학생 역할을 맡는 참가자는 실험자에 의해 고용된 사람이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하에서는 선생 역할을 맡은 진짜 참가자를 '피험자'라고 칭한다).


회색 가운을 입은 실험자는 학생을 실험실 건너편 방에 있는 의자에 앉히고 양팔을 묶은 다음 손목에 전극봉을 부착한다. 선생 역할을 맡은 피험자는 단어의 기억과 관련된 문제를 내고, 학생은 답을 말한다. 학생이 오답을 말하면 피험자는 뒤에 앉아있는 실험자의 명령에 따라 학생에게 전기 충격을 가한다. 학생이 틀릴 때마다 전기 충격의 강도는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점점 더 높아진다(실제로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며,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이 전기충격을 받는 것처럼 연기한다).


E(Experimenter)는 명령을 내리는 실험자, T(Teacher)는 선생 역할을 맡은 피험자, L(Learner)은 학생 역할을 맡은 연기자. 출처 : 위키피디아


많은 전문가들은 450볼트의 전기 충격을 가하는 피험자가 극소수(0.1%)에 불과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60%에 가까운 사람들이 최고 전압인 450볼트의 충격을 가했다. 이러한 실험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밀그램은 피험자들이 왜 특별한 원한관계도 없는 학생에게 450볼트나 되는 전기충격을 가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이성으로 억압하고 있던 잠재적 공격성이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외부로 표출된 것일까? 혹시 스탠포드라는 명문대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기 때문에 피험자들이 실험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한 것은 아닐까?


스탠리 밀그램은 여러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조건을 바꾸어가며 총 18가지 실험을 진행한다. 피험자를 여성으로 바꾼다거나, 실험자가 실험실을 떠나 전화로 명령을 내리거나, 스탠포드가 아닌 일반 빌딩 사무실에서 실험을 실시하는 등. 이와 같은 변형 실험 결과에 따르면, 권위자의 권위 자체가 박탈되거나, 학생 역할을 맡은 동료들이 실험을 거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험자의 명령에 불복한 피험자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피험자가 극도의 긴장상태에 빠졌지만, 실험을 실제로 중단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도 아니고, 명령을 내리는 실험자가 직장상사처럼 큰 불이익을 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피험자들은 실험을 계속하라는 권위자(실험자)의 말에 복종했다. 실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실험실에서 뛰쳐나가도 되는데 말이다.


이에 관해 밀그램은 우리가 권위 체계에 편입되는 순간 대리자적 상태(agentic state)에 빠진다고 설명한다. 대리자적 상태에 빠지는 순간 스스로를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도구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일단 대리자적 상태에 빠지면 본인은 단순히 권위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러한 심리상태가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복종실험은 나치에 의해 조직적, 체계적으로 수행된 유대인 학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기획되었고,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민간인 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주로 인용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쉽게 말하면 명령에 불복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만 발생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복종 실험에 따르면, 권위자가 별다른 불이익을 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쉽게 권위에 도전하지 못한다.


우리는 유대인 학살이나 기업 범죄 사건을 바라보며, 나같으면 그런 조직적 범죄에 동조하지 않았을 거라고 쉽게 말한다. 최근에 문제가 된 블랙리스트,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도 비슷하다. 그러나 학교나 직장에서 선생님이나 상사의 부당한 명령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거부해 왔는지 돌이켜보자.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기억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권위에 훨씬 순종적이며, 이는 가정, 학교, 직장에서의 오랜 학습이 반영된 결과다.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밀그램의 총 18가지의 실험 중 가장 많은 피험자들이 실험을 거부했던 조건은 실험에 선생으로 참가한 다른 동료들이 실험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경우였는데,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결국 복종 실험에 따르면, 내가 단순한 대리자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부당한 명령에 거부하는 자와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부당한 명령이 초래할 비극적인 결과를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스탠리 밀그램 지음, 정태연 옮김, 에코리브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