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한 조각, 거창하지 않은 여행기
작년과 올해 2년간 정말 미친듯이 여행을 다녔다. 국내외 가리지 않고 돌아다닌 덕에 자의 반 타의 반 출국금지령이 내렸다.
보통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해서 갚아줄 터인데 -특히 미래의 나는 나보다 어른이니까 - 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족들의 걱정도 덜 겸, 이번 마지막 휴가 이틀은 해외여행을 하지 않고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제주도에 ‘또’ 왔다. 매년 오고 또 와도 질리지 않는 신기한 이 섬.
12년도였나, 11년도였던가, 태어나 처음으로 제주도에 왔다.
대학 합격 결과를 기다릴 때였으니 12년도 초가 맞다.
핸드폰마저 없애고 준비했던 수능이 끝났지만, 아슬아슬한 대기번호를 받은 터라 도저히 서울에 있기가 힘들었다.
제발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가자는 나의 애원에 부모님은 제주 여행을 가자고 하셨다.
아마 부모님은 나보다 더 힘드셨겠지.
기억도 잘 안나는 몇 년 전 일이지만, 두 가지 장면만 강렬하게 남아 있다.
눈이 잔뜩 쌓인 절물자연휴양림에서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걸으며 온 가족이 벅찬 마음을 어쩌지 못했던 것과, (추가로 미친듯이 울어제끼던 까마귀도)
틈날 때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며 발표를 기다리다 지쳐, 숙소에서 반신욕을 할 때다.
멍하니 앉아 손으로 물장난을 치며 있는데,
문 밖에서 부모님이 빨리 나오라고 고함을 치신다.
진짜 불 난 줄 알았다.
아 심지어 여기서 알몸으로 생을 마감한다고? 하며 후다닥 수건을 감싸고 뛰쳐나갔는데,
목숨이 안전하다는 기쁨인지 합격의 안도감인지 부모님 앞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기에 어쩌면 자꾸 이 곳에 돌아오는 지도 모르겠다.
(핑계다)
일 년에 최소 한 번은 제주 여행을 했다.
그냥 둘러보다 편도 표가 9900원이길래 혼자 무작정 떠나기도 했고, 친구들과 한참 전부터 계획을 세워 다니기도 했다.
혼자 갈 땐 주로 사람 많은 관광지나 카페 위주로,
두명이 갈 땐 올레길을 걸었고.
여럿이 갈 땐 어느 정도는 어디 갈지 미리 구상을 했다.
구상이래봤자 일단 가고 싶은 곳 다 지도에 뿌려 놓고 알음알음 가는 정도긴 했다.
이번 여행은 반반이다. 내가 먼저 이틀을 보내고, 고등학교 친구가 합류하기로 했다.
5일간 제주에 혼자 있기엔 또 너무 심심할 것 같아 친구가 스케줄을 조정해준 게 너무 고마웠다.
지금 이 글도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며 숙소에서 쓰고 있다. 해 진 후라 아주 깜깜하다.
숙소: BJ Stay 4인실 1박
토요일 4시 비행기로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5시쯤. 배가 살짝 고팠지만 일단 캐리어를 숙소에 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작년 이맘 때 묵었던 공항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아쉽게도 사장님은 나를 기억 못하시는 듯 했지만 리마리오를 꼭 닮은 건 여전하셨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디테일을 살려 주시는 훈훈한 마음씨도.
방에 들어가 짐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옆 침대 사람이 들어오며 환하게 인사를 건넨다.
“혼자 왔니? 아님 친구도 왔어?”
이게 무슨 질문이지 싶어서 혼자긴 한데...? 라고 했더니 너무 좋아한다.
미얀마에서 온 Jessica는 오늘 혼자 너무 심심했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31살이고, 본업은 통신사에서 일하는데, 코스메틱 사업을 하고 싶단다.
나중엔 자신만의 브랜드를 런칭하고픈데 한국 화장품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걸로 일단 시작해보고 있다며
나도 잘 모르는 브랜드 이름을 줄줄 읊었다.
어제 제주에 왔다길래 오늘은 뭘 했냐고 물어보니,
도저히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시장 구경을 했고,
아무래도 내일도 이러면 안될 것 같아 투어를 예약하고 들어오는 참이란다.
이야기를 한참 하다보니 밖에서 먹기는 귀찮아져서 필요한 걸 사러 이마트에 가는 김에 먹을 걸 좀 사오기로 했다.
함께 쇼핑을 하고(한국 여자들은 피부가 왜이리 좋아?)
초밥과 닭다리 구이, 와인을 한 병 사서 돌아왔다.
제시카는 와인을 고르며 웃픈 일화를 들려줬다.
“김포공항 편의점에서 배가 고파 김치컵밥과 물을 한 병 샀는데, 어떤 게 물인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일단 fresh랑 물방울이 그려져 있길래 샀어. 근데 진짜 밥이 너무 매운거야.
나 태국에도 살고 해서 매운 거 잘 먹거든? 솔직히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급하게 물을 들이켰는데,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다 뱉고 입을 씻느라고 혼났지 뭐야”
안타깝고도 귀여워 한참을 웃었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외국에 나가 비슷한 봉변을 당한 적이 많다.
그나마 영어로 뭐라도 써 있으면 다행이지, 그 나라 언어로만 적혀 있으면 정말 사소한 물건 하나도 한참을 들여다보고, 물어보고 사게 된다.
교환학생 땐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은데 포르투갈어로는 ‘삼겹살’, ‘500그람’, ‘주세요’ 중 그 어느 말도 할 줄을 몰랐다.
결국 번역기와 손짓발짓을 총동원해 마트 직원과 스무고개를 한 끝에 하여튼 돼지고기를 사긴 샀다.
(맛있었다)
동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휘핑크림도 아닌 시큼한 요리용 크림같은 걸 우유라 생각해 샀고, 한 입에 들이켜곤 말그대로 뿜어내기도 했다. 아직도 그게 뭐였을지는 정확히 모른다.
한국에 처음 와 비슷한 일을 겪을 외국인들이 많겠단 생각이 들었다.
진한 소주와의 추억을 갖게 된 제시카를 위해 건배한 와인은 다행히도 둘 모두에게 잘 맞았다.
초밥과 닭다리를 나눠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에선 구글맵 위치가 잘 안잡히는 것 같다는 말에 카카오맵을 알려주었고,
내친 김에 파파고(번역)라던가 SNOW(사진) 어플도 소개해 주어 한참을 낄낄대며 놀 수 있었다.
나중엔 옆에서 조용히 홍시를 드시고 있던 중국 아저씨까지 합세해 수다를 떨었다.
중국아저씨는 미얀마와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제시카는 중국인 보스 밑에서 미얀마와 한국 관련 일을 하고 있어 얘기 할 거리가 참 많았다.
예를 들면 왜 중국인(+한국인)은 th발음을 제대로 하지 않는가 라던지. (딱히 결론은 없었다.)
어느덧 잘 시간이 되었는데도 중국 아저씨는 내일 한라산을 간다는 사람이 맞는 건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꺼냈고,
기가 빨려버린 난 결국 방에 슬쩍 들어오고야 말았다. 죄송해요 아저씨 오늘 등반은 잘 하셨나요?
뒤따라 들어온 제시카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새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