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콕 혹은 너네 집콕
춘삼월의 중순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춘'삼월은 한국에서의 삼월, 이곳은 여전히 '동'삼월이다.
한국에는 봄바람이 불고 꽃도 피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는 소개팅 주선이 늘어나고 있다던데 여기는 아직도 눈밭이다. 아름다운 엘사는 핀란드를 사랑해.
월요일에 출근하면 의무적으로 서로에게 묻는 질문들이 있다: 주말에 뭐했니? 재밌는 일 없었니?
나의 직장 동료들은 거의 다 어미 아비님이시라 주로 아이들과 무얼 하며 보냈는지 말씀해주시고 혹은 다른 곳에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종종 해주신다.(시댁에 다녀왔다던가 하는...) 2월 말쯤이 아이들 스키 방학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왔다고는 하는데 어땠냐고 물어보면 다른 설명 없이 일단 먼저 피곤하다고 한다. 특히 아들 둘 (5살과 8살) 키우는 분이 있는데 진짜 미쳐버리겠다고 대답을 해줘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 지 난감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동료분들은 남편도 아가도 없는 싱글 외국인인 나의 주말에 대해 아주 궁금해하신다. 마치 준비물처럼 재밌는 에피소드를 주머니에 쟁여두고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
흠. 지난 주말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그전에 나란 사람의 한국에서의 주말은 어땠는지 먼저 살펴보자. 한국에서 직장인 생활을 할 때 나의 주말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모임을 한다던가 가끔 소개팅을 하기도 하고 유학 준비를 할 시절에는 집콕해서 혼자 온갖 짜증을 참으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고독에 빠졌을 때는 시네큐브에 가서 혼자 영화 보고 집까지 걸어가는 게 나름의 낭만이었다. 친구들을 만나지 않을 때는 혼자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가기도 하고 집에서 밀린 예능을 본다던가 하는... 생각해보니 그냥 혼자 보내는 시간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아무튼 파티 파티 놀자 놀자 마시자 마시자 스타일의 파티걸은 아니었던 편.
헬싱키에서 보낸 최근 주말들을 되돌아보니: 술, 술, 술? 술!
헬싱키에 와서 보낸 나의 주말들은 어떠한가. 사람이 쉽게 바뀔 리 있나. 다만 이곳에 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석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같은 과 친구들과 조금 더 열심히 어울렸던 것은 사실이다. 부족한 체력을 끌어모아 술도 마시러 다니고 여기저기 카페도 다녀보곤 했다. 하지만! 그 열기도 금방 식기 마련. 우리네 모두들 20대 초반에 해보았잖아요? 그리고 체력이... 휴 정말 체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 후의 주말들도 사실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끔 친구를 만나서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기도 하고 일주일 동안 먹을 장을 본다던가 한다. 얼마 전 주말에는 이케아에 가서 식물들을 사 오기도 했다. 날이 좋은 여름쯤에는 아름다운 공원을 거닌다던가 숲에 가서 베리를 딴다거나 카페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기라도 하겠지만 요즘같이 추운 날에는 뭐니 뭐니 해도 집에서 넷플릭스 보면서 아이스크림 먹는 게 최고다. (이냉치냉)
단순히 내 주말들에 대해 이야기하자니 넘나 노잼이라 지난 한 달의 네 번의 주말을 어찌 보냈나 한번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놀랍게도 최근 네 번의 주말들은 모두 예외적으로 이벤트가 많았다.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서 여러 친구들과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다음 날에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김치를 담갔다. 그리고 그다음 주 주말에는 잠시 프랑스에 여행을 다녀왔다. 그다음 주에는 이케아에 가서 쇼핑도 했고, 지난주에는 집에서 밀린 과제들을 하고 저녁에는 바에서 술을 마셨다. 이런 이벤트들이 아주 자주 일어나는 게 아닌데, 연달아 몰아했더니 지금 아주 많이 피곤하지만 의외의 에너지들을 많이 얻은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매주 술을 많이 마셨네요.
집으로 모여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젊은이들은 무얼 하고 놀까. 이건 사람의 취향과 생활 습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변 핀인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본모습은 나랑 크게 다르지 않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긴다던가 벼룩시장을 구경가기도 하고 오후 쯤 카페에서 만나 차도 마신다. 하지만 이곳의 물가는 굉장히 불친절한 편이다. 그래서 보통 친구들과 시간을 오래 보낼 때는 누군가의 집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특히나 주변에 아직 20대인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 주변을 보면 외식을 하기보다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남자애들은 친구들이랑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것도 많이 봤다. 일단 누군가의 집에서 파티 명목으로 모여 각자 사 온 술들을 풀어 마신 후 적당히 취하면 분위기만 맛보러 바에 가서 한잔 한다던가 혹은 클럽에 음악을 들으러 혹은 춤을 추러 혹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 처음부터 술집에서 시작하면 계산할 때 많이 놀라게 될 거다.
친구들 집에서 하는 파티가 빈번하진 않지만 두세 달에 한번 정도는 친구네 파티에 갈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 누군가 이사를 해서 집들이를 한다던가, 누군가 어디로 긴 여행을 떠나서 굿바이 파티를 한다던가, 생일 파티라던가, 아니면 그냥 저녁을 함께 먹는다던가. 이번 파티는 친구 중 독일인 친구가 교환학생으로 핀란드를 떠나게 되어서 겸사겸사 모인 파티였다. 친구네서 함께 저녁을 먹을 때면 각자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 온다던가 아니면 같이 요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집주인 친구가 쉐프가 되어 우리들에게 재료를 주문해서 각자 사 올 수 있는 것들과 술을 더해서 사 왔다. (아래 참조: 신선한 바질, 브리치즈, 크런치한 빵 (+가능하면 글루텐 프리 빵), 2-3개의 아보카도, 신선한 대추 (음 우리나라 대추랑은 좀 다른 열매 같은 느낌이다 사실), 1.5-2 kg의 감자)
6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역시나 그렇듯 우리는 거의 7시쯤 모였고 그때부터 요리를 시작해서 8시나 돼서야 먹기 시작했다. 배고파 미치는 줄 알았다.
이번 친구네 모임에서는 8명의 사람이 모여서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간소하게 준비를 아주 잘해줬다. 누군가가 사 온 스파클링 와인으로 식전 음료를 즐기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요리로는 샐러드 두 가지 종류와 베이커리에서 사 온 빵, 그리고 버터와 후머스를 스프레드로 준비했다. 두세 가지 정도의 치즈와 말린 과일들도 있었고 주 요리는 만들기 쉬운 잘게 썰어 구운 감자였다. 크게 차린 건 없었지만 다들 배부르게 먹었던 것 같다. 디저트로는 친구와 내가 준비한 와플+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시중에 파는 와플을 오븐에 살짝 굽고 아이스크림을 올리고 두세 종류의 베리를 뿌려서 아주 손쉽게 완성했다. 아쉽게도 사진이 없다. 특별한 한국음식을 먹을 때가 아니면 사진을 잘 안 찍게 된다.
마실 술은 알아서 챙겨 와
이것도 주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기에서 보통 내 주위에서는 어디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하면 와인 한 병 정도는 선물로 들고 가는 편이고 본인이 더 취하고 싶은 날이라면 추가로 마실 술을 챙겨가는 편이다. 이곳에서의 와인 한 병 값은 7-8유로 정도부터 시작하는 듯하다. 그 위로 비싼 것들도 많고. 핀란드에서는 맥주와 롱드링크, 사이더를 제외한 모든 주류를 Alko라는 곳에서만 살 수 있다. Alko는 정부에서 관리하는 주류판매점으로 평일 9시, 토요일 6시까지만 열고 일요일엔 문을 열지 않는다. (Alko에서는 5.5% 이상 알코올 농도의 맥주, 와인, 다른 종류의 모든 술들을 취급한다.) 다음에 한번 이곳의 주류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일반 마켓에서 파는 맥주, 롱드링크, 사이더도 저녁 9시가 지나면 살 수 없다.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 문제를 정부에서 심각한 사안으로 다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알코올 중독이 사라질까? 오전 7시부터 마켓이 여는데 그때부터 마시면 그만인 것을. 아무튼 이곳에서는 미리 술을 사두지 않으면 원할 때 술을 마실 수 없다. 밤 늦게 술이 땡긴다면 그때는 아직 열려있는 술집을 찾아가야만 한다. 새벽에는 문을 연 술집들도 손에 꼽을 정도로 찾기가 힘들지만.
보통 홈파티에서는 와인, 맥주, 사이더, 롱드링크가 주류를 이루지만 종종 진토닉이나 위스키도 등장한다.
핀란드 진이 꽤 맛있다. 먹는 방법 또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하나 소개하자면: 진에 토닉을 섞어 로즈메리와 베리를 넣어 먹는다.(베리는 링곤베리, 클라우드 베리 등등을 넣어 먹는다. 주로 링곤베리를 넣어 먹었던 듯!?) 한국에 이 진을 선물로 사간 적이 있는데 꽤 반응이 좋았다.
무슨 요리를 해 먹나요?
내가 한국사람이다 보니,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나를 불러서 같이 한국 음식을 해먹은 적이 여러 번 있다. 김밥도 같이 싸 먹고, 된장찌개, 고추장찌개, 불고기, 김치전, 감자전 등등을 해먹은 것 같다. 애들은 맛있다고 해주니 정말 감사하지만 난 한국에 가서 남이 해주는 한국음식을 먹고 싶다.
그렇다면 핀란드 친구들이 해준 요리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음. 핀란드 친구들 중에서 산타의 고향인 라플란드에서 온 친구가 있는데 저번에 엄마가 직접 보내준 순록 고기를 요리해준 적이 있었다. 시중에 파는 순록 고기보다 훨씬 맛있고 부드러웠다. 이런 특별한 메뉴를 제외하고 핀란드 친구들이 생활에서 즐겨먹는 음식들은 여타 다른 유럽의 음식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샐러드, 파스타, 스테이크 등등.... 특별히 핀란드식 음식이라 할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해보니, 집에서 해 먹었던 것들은 소고기 스튜, 연어 요리, 비트 요리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여전히 비슷한 것 같다.)
핀란드 음식 중에서 나의 훼이보릿 하나 소개하자면, 바로 Leipäjuusto (레이빠유우스또)다. '구운 치즈', 혹은 '치즈빵'정도로 소개할 수 있겠다. 이 치즈를 오븐에 덥혀 Cloudberry라고 불리는 베리로 만든 잼을 얹어 먹는다. 칼로리가 높은만큼 짱맛이다. (Cloudberry를 사전으로 찾아보니 호로딸기라고 하는데......ㅁ..뭐?)
혹시 핀란드를 오시게 된다면 한 번씩 드셔 보시길 바란다. 특히나 본인이 치즈 덕후라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임.
집으로 초대해서 먹는 다이닝 문화
이 나라는 추운 나라라서 그런 건지, 비싼 물가 덕분에 외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전에 스쳐 지나가며 봤던 다큐멘터리에서 스웨덴과 노르웨이도 다르지 않다고 했던 것 같다. 북유럽의 인테리어와 식기 디자인의 발달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단 나만의 집이 아니더라도 실내에서 보낼 시간이 많은 것이다. 1년 중 겨울이 6개월 (11월부터 4월까지)이다 보다 실내에서 보낼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고 그만큼 집이 주는 아늑함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리지 않는 단순함과 편안한 느낌의 인테리어가 발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손님을 초대해서 함께 밥을 먹는 문화가 있다 보니 집에서 차려 먹는 다이닝 문화와 연결된 디자인들도 잘 발달한 것 같고.
핀란드 디자인 제품을 이야기할 때면 이딸라와 아라비아 그리고 마리메꼬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딸라와 아라비아는 식기와 도자기로 유명한 브랜드이고 마리메꼬는 패션 브랜드지만 식기 디자인이 너무 예쁘다. 내 핀인 친구들의 집에는 정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이딸라, 아라비아 혹은 마리메꼬 식기 세트가 꼭 하나씩은 있다. 자국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아이가 첫 독립을 할 때 엄마들이 챙겨주는 건가 싶을 정도로 다들 가지고 있다. 가격이 착하진 않지만 핀인들을 디자인 제품에 기꺼이 돈을 쓰는 편이다. 그만큼 소비를 할 때 고민을 많이 하고, 한번 사면 오래 쓸 수 있는 가치를 구매하는 소비문화가 있다.
(+추가 번외) 김치를 담근다고?
그렇다. 나는 김치를 담가 먹는다. 놀라지 마시라.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물론 여기에도 김치를 판다. 그런데 정말 비싸고 맛이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김치를 나도 모르게 담가 먹고 있더라. 여기는 추운 나라라 파는 배추가 고랭지 배추처럼 두껍고 아삭아삭한 편이다. 꽤 김치 만들 맛이 난다. 아시아 음식 문화에 아주 관심이 많은 친구가 작년부터 같이 김치를 만들자며 계속 날 꼬셔왔는데 몇 주전에 드디어 함께 김치를 만들게 됐다.
이번 김치 워크숍의 참가자는 나를 제외한 네 명의 핀인과 한 명의 독일인. 네 명의 핀인들은 자칭 김치 Fan으로서 주기적으로 김치를 (나보다 더 많이) 사 먹는 애들이었다. 물론 내가 한국에서 엄마의 1등 보조가 되어 김치를 몇 번 버무려 본 경험은 있지만 김치를 만들어본 적도 없는 외국인 아이들을 데리고 김치를 담그려니 처음엔 정말 부담이 됐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시 잠깐 왕이 된 기분이었다.
작은 배추 12포기를 담갔는데 색도 어여쁘게 나온 것이 친구들 반응이 정말 좋았다. 보쌈을 해서 같이 먹고 싶었지만 만들기 손쉬운 불고기로 대체했다.
생각보다 이곳에서 김치의 인기가 높은 편이다. 몸에 좋은 음식 발효 음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고 특히 한국 음식을 좋아하거나 관심 있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한국 문화라면 케이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에 지지 않게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교환학생을 한국으로 다녀온 외국인 친구들은 누. 구. 나. 음식 이야기를 한다. 아쉽게도 헬싱키에는 아직 한국 음식점이 많지 않다. 그래서 아직까지 내 친구들이 내 음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비교대상의 한계)
이렇게 지난 주말들을 들여다보니 너무 바쁜 주말들을 보냈구나 싶다.이번 돌아오는 주말에는 본래의 나로 돌아가 게을러져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직딩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주말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대충 보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휴식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가끔은 프로 게을러가 될 필요도 있겠다. 그 가끔을 이번주 너로 정했다!!
헬싱키에서 보낸 주말편.
핀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