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읽는 매거진의 이번 호 주제는 '악기'였다. 내가 연주할 줄 아는 악기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상 가까이 악기를 두고 즐겁게 연주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신기했다. 악기란 게 부담을 가질 만큼 거창한 게 아니고, 이렇게 편안하게 접근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 특별한 날, 귀엽게 축하송 정도는 들려줄 수 있는 악기 하나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다지 좋은 기억도 아닌데, 살아가며 오래 남아있는 순간이 있다. 악기에 대한 생각을 하다 나의 암흑기였던 중학교 때의 한 순간이 떠올랐다. 사춘기와 더불어 나를 맹렬히 공격했던 여드름, 그리고 초라했던 우리 집에 대한 의식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거울 속 내 모습도, 내 마음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안개가 자욱했던 날들이었다. 어느 날 음악 선생님께서 각자 한가지 악기를 골라 연주하는 수행평가를 진행하겠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악기에 대한 편견이 더 컸다. 악기 연주는 여유 있는 친구들이 레슨을 받으며 꾸준히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어떤 악기를 준비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리코더나 멜로디언을 하기엔 재롱발표회 같았다. 그러던 중 친한 친구 혜은이가 소진이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회다 싶어, 같이 배우고 싶다고 했다. 혜은이는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일단 알겠다고 하고, 우리는 약속한 날 소진이의 집에 찾아갔다. 통나무로 되어 있는 소진이의 집에 멋들어진 까만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돌아가며 피아노 연습을 했다.
첫 연습을 하고 돌아온 며칠 뒤. 혜은이가 찾아와 덜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니 때문에 소진이가 피아노 안 가르쳐준다 한다이가! 그러니까 내 혼자 하려고 했는데,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내까지 못 하게 하는데!"
혜은이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우리 둘을 알려주기에 벅찼던 소진이가 짜증을 내며 못 하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자세하진 않지만, 이때 혜은이가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은 오래 남았다. 여러 감정이 들었다. 나 때문에 괜히 피해를 보게 된 혜은이에게 미안했고, 이제 또 수행평가를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막막했다. 사실 나도 누군가의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연습해 실력을 뽐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서러움이 가장 컸다. 울컥했다. 그렇게 혜은이 혼자 피아노를 배우게 한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긴 했었다. 다들 그러하듯 체르니 몇 번까지. 하지만 손 놓은 지 오래된 피아노 실력은 형편없었다. 유일하게 손이 기억하고 있던 곡이 '젓가락 행진곡'과 '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더는 방법이 없던 나는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하기로 했다. 주로 친구들끼리 장난치며 연주했던 '젓가락 행진곡'보단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의 수행평가 당일. 나처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나의 눈에는 피아노, 플롯, 심지어 바이올린까지 준비해, 멋진 연주를 들려주는 친구들만 보였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피아노 건반을 잡으면 어느 정도 기대하는 바가 있을 텐데, '즐거운 나의 집'은 영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드디어 나의 순서가 되었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으니 열심히 쳤다. 내 마음도 모르는 피아노 소리가 신나게 교실을 울려 댔다. 연주가 끝난 뒤, 분위기는 예상대로였다. 저건 나도 칠 수 있는데, 그럼 나도 피아노나 할 걸. 부끄러웠다. 친구들은 금세 잊었겠지만, 나는 꽤 오래 이 순간을 담아두고 속상해했다. 이때의 기억이 내 머릿속, 악기에 관한 가장 강렬했던 기억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악기란 것에 더 거리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연히 피아노를 칠 기회가 오면, '즐거운 나의 집'이 떠올라 건반을 두드리게 된다. 내게 '즐거운 나의 집'은 즐거운 선율과는 반대로, 자신을 힘든 상황 속에 더 가둬두고 힘들게 했던 한 안타까운 소녀가 떠오르는 곡이다. 이제 유일한 나의 대표곡은 내려놓고, 다른 곡을 연주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