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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r 18. 2021

싱가폴에서

스물여덟 살 두리의 마지막 항해 - 8

닻을 내려준 우현 윈드라스의 모습


새벽에 싱가포르 해협의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는 모든 게 다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밝게 웃고 있는 중천의 보름달 같은 마음이었다. 그랬던 기분이 달도 차면 기운다던가? 어느새 서편으로 넘어가는 보름달이 구름 속에 갇혀버리어 어두워진 하늘을 보게 되니 답답한 마음이 슬그머니 찾아오며 어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선다.


도선사를 태우려고 찾아가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속력도 낮추고 신경 쓰며 가고 있는데 갑자기 도선사가 본선의 승선 약속 장소가 아닌 곳에서 타겠다며 배를 돌리라는 말을 해온다. 많은 배가 항상 들락거리는 곳이기에 조심스러운 맘가짐으로 접근하던 중이므로 앞쪽에서 바지를 끌고 있는 예인선이 방금 드레져(*주1)를 지나치며 우리 앞길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도선사의 요청에 맞추려 타를 우현 최대로 돌리게 조타 지시를 내려준다. 일단 움직임을 시행하려면 행동을 크고 명확하게 시행하며 표시해야 하니 가차 없이 돌리라는 갑작스러운 명령에 미얀마 타수가 얼떨떨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접근한 도선 선에서 파이로트는 높다란 사다리를 타고 선체 외판 면을 기어 올라와서 이어진 파이로트 사다리에 옮겨 타서 마치 곡예라도 하듯 힘겹게 올라온다. 눈치를 보며 최대로 공손하게 대응해주며 조선에 임하는데 마침 우현 변침에 따른 기적 장성 일발을 요구해와 스위치를 누르지만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기관실에 연락하여 즉시 에어를 올려 주도록 했는데 알았다고 했지만 아직 불통이다. 이럴 경우 지시 사항이 이행될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은 가장 조급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법이다.


당직사관이 다시 눌렀는데 이번에는 웬걸 한번 터진 기적(汽笛) 음이 높낮이도 일정하게 멈추지를 않고 마냥 이어져 나오고 있다. 소리가 안 났을 때는 눈치를 보면서도 그럭저럭 넘어갔는데 바로 머리 위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소리는 감출 길도 없으니 당황의 극치를 달리게 한다. 속으로 치솟는 울화를 참으며, 덩달아 어쩔 줄 몰라하는 당직자들에게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느긋이 가지라며 달래 가며 이야기하지만 속은 계속 부글부글 끓고 있다. 계속 울려 퍼지는 기적소리가 머리를 쭈뼛거리게 만들어 신경마저 곤두서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 에어를 꺼달라고 사정하듯 기관실에 연락하는 심정은 솟아오르는 화에 비례하여 착잡하게 억눌러 준다. 

소리가 뚝 끊어졌다. 이제 되었구나 싶어 얼른 눈치를 보며 더 이상 덧나갈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조바심을 꺼준다. 투묘지가 바뀐 상황에서 도선사는 원래의 곳으로 갈 수 없다며 지금 있는 근방에 닻을 내리겠다는 말투로 보고를 한다. 

더 이상 배에서 사용할 일 없어 하륙을 기다리는 페인트들

항만 당국에서도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조금 앞으로 나가서 닻을 내릴 준비를 시킨다. 자력도선(*주2)이 허용된 이곳이지만 만약 내가 자력 도선을 택했다면 이런 때 내 마음대로 투묘지를 바꿔 달라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 일이라 여겨진다. 예전 싱가포르에서 벙커링(*주3)을 위해 처음 입항했을 때 자력 도선을 했다가 예정투묘지를 조금 벗어났다면서 다시 움직여 재 투묘하라는 지시를 받아 한 시간 이상을 더 사용하여 투묘한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을 한 이후 싱가포르에 입항 시에는 꼭 도선사를 수배하여 작업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고 출항 때에만 자력 도선으로 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보드 앵커 스탠바이!"(*주4) 가장 조마조마하게 생각하고 있든 구령이 파이로트 입에서 나왔다. 하필이면 양현 앵커 중 더 나쁜 상태의 우현 묘(*주5)를 사용하겠다고 할 건 뭔데…… 하는 맘이 들었지만, 그대로 복창하여 선수로 지시를 내려준다. 하필이면 우현 묘? 하는 마음으로 힐끗 그를 쳐다본다. 그러나 그는 왜 내가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고 알아도 안 되는 따지고 보면 우리 배의 결함 사항인 것이다. 


이번 항차 두 번 써야 하는 투묘 중 될수록 사용치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 우현 묘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닻은 내려졌고 파이로트도 부리나케 하선하여 한시름 놓는다. 방금 보트로 내려선 파이로트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선수에서 촤르르~하는 굉음과 함께 뿌연 녹 먼지가 뿜어 나는 화산재처럼 솟아오르며 우현 묘의 신출이 진행된다. 보트에서의 파이로트도 힐끗 쳐다보더니 머리를 돌려 나를 보더니 그냥 떠나간다. 


체인의 장력이 너무 커서 스스로 풀려 나갔는가 걱정되어 선수에 물어본다. 그건 아니고 조금 더 신출해 주려고 하다가 그리 되었다는 보고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사항이다. 이제 이곳을 기항하게 된 이유가 되는 선용품의 하륙을 위해 SWL 0.9 Ton(*주6)이라는 초라한 마킹을 그려 받고 있는 작은 크레인이 그나마 진가를 발휘할 시간이 되었다.

폐선하기 전 배에 남아있던 잉여 선용품을 가져가기 위해 온 보트 

내려 줄 페인트의 마지막 두 번째의 슬링(*주7)을 걸어 내리다가 그만 전원장치의 기둥인 트란스포머(*주8) 가 타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도 그 슬링을 걸어 놓은 채 스톱된 상태라 그대로 내려 주기 위해서는 손으로 핸들을 역으로 돌려서 내려주는 방법밖에 없는 상황이라 전 갑판부원은 다 모여 돌아가며 핸들을 돌려준다. 그런 수작업 속에 늦어지는 시간을 아낄 거라고 나머지 페인트 통은 달랑 손잡이에 줄을 걸어 내려주는데 그만 손잡이가 떨어지며 두 개의 페인트 통이 보트 갑판 위로 떨어져 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마침 그 밑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란 마음도 잠깐, 배 위에 부어진 페인트가 바다에라도 흘러들면 그 또한 큰일 마침 그 통선의 선원들이 얼른 붓을 들고 나와 횡재하듯 굴러 들어온 페인트를 자신들의 배에다 흩어내듯 칠해주기 시작한다. 일하다 말고 아니 일도 중단시킨 채 그렇게 칠부터 하기 시작하건만, 더 이상 뭐라 못하고 크레인에 매달려 있는 슬링을 빨리 내려주기 위해 전 선원이 한 번씩 핸들을 돌리는 일에 다시 매달렸다.


이 일이 진행이 될 만하니까 이번에는 억수 같은 소나기가 쏟아붓는다. 싱가포르에서는 이 시즌이면 볼 수 있는 기상상황으로 이들에게는 아주 고마운 비로 무더움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활력소가 되는 비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나기

하지만, 우리로서는 재앙에 가까운 기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선 일을 중단하고 비를 피해 삼삼오오 앉아들 있는데 퍼부은 빗물은 작은 내같이 갑판을 흘러내리면서 윈치를 쓸 때에 새어 나와있던 기름기를 몽땅 쓸어 모아 드레인(Drain) 홀을 통해 바다로 쏟아부어준다. 그 기름기가 유출유 사고라도 내어 말썽을 부릴까 걱정되는 마음에 어찌 손을 써보라는 내 지시에 일항사는 갑판으로 나갔다가 비를 흠뻑 맞으며 들어온다. 다행히 더 이상 많은 기름기는 나가지 않고 그냥 있는 둥 마는 둥 한 기름기만 살짝 비쳤다가 넓게 퍼져 나가니 그리 흉하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린다. 

출항시간을 일차로 잡아 본 저녁 다섯 시가 넘어가도록 작업은 계속되었다. 대리점원이 먼저 나가기 전에 세관용으로 갔고 간 서류에 양륙 할 물건의 숫자가 혹시 달라질까 우려되어 잘 체크하여 하륙시키라고 3항사도 작업 참여하며 서류 꾸미는 일을 하게끔 지시해둔다.


사고는 이어지는 습성이 있어 한번 시작되면 꼬리를 물게 되니까 더 이상 이어진 일이 발생하게는 않겠다는 각오로 일을 진행하면서 출항시간이 좀 늦더라도 철저히 해서 나간다는 방침을 굳힌 것이다. 


*각주

*주1 - 준설선(dredger, 浚渫船) : 강·운하·항만·항로의 깊이를 보다 깊게 하기 위한 준설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선박

*주2 - 도선사를 승선시키지 않고 선장이 스스로 도선함

*주3 - Bunkering – 배의 연료을 싣는 일

*주4 - 배에서는 우현을 Starboard, 좌현을 Port로 지칭한다

*주5 - 묘(錨) – 닻(Anchor)

*주6 - S.W.L (safety working load) : 안전작업하중

*주7 - sling - 무거운 짐을 크레인을 사용해서 취급 운반할 때 사용하는 인양로프 또는 인양용구

*주8 - Transformer(변압기) - 교류의 전압을 바꿔 주는 장치



*9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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