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살 두리의 마지막 항해 - 11
그가 노련한 항해사이건 아니건 간에 어떠한 항해사라도 배를 타면 원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항해 운이 좋아서 바람과 파도를 만나지 않고 항해하는 것. 아주 소박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번 항차에는 유별나게 그런 항해 운이 좋아서 무던하게 여기까지 왔다. 하기야 두리 호로서도 마지막 가는 길인데 항해라도 제대로 멋있게 마무리 짓는다는 게 얼마나 바람직한 일일까?
마침 오후 3시경의 한창 대낮이다.
말라카 해협의 유명한 천소(淺所)(*주 1)인 ONE FATHOM BANK(*주 2)를 관광객의 눈길 되어 유심히 살피며 지나가도 되게끔 시간이 알맞은 한낮이다. 지금이야 밤낮도 없이 수시로 선박의 현 위치를 정확하게 낼 수 있는 전자 항해 계기가 수두룩한 세월이다. 어둠이 다가온다고 크게 신경 쓰일 일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어둠은 긴장감을 가지게 하는 기제이므로 그런 편리한 장비가 없었던 시절에는 밤이란 어둠이 선박의 조종에 한 겹 더 어려움을 주는 사항이 되기도 했었다.
따라서 이 천소에 접근하는 항해를 할 때에는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이며 무사하게 이곳을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품으며 지나쳤고 낮에 통항하는 맞춤이 되면 또 얼마나 안도하며 좋아했었던가? 그렇게 아련한 추억을 머금은 곳이다.
오늘은 그렇게 한낮의 시간에 이곳을 지나니 관광객이 된 듯한 마음으로 새삼 등대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으며 여유 만만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편한 맘으로 안전하게 지나쳐 가는 등대의 모습이 저만치 뒤로 물러나 가물거리는 점으로 변해갈 무렵, 우리의 앞쪽 침로선 부근에 정선했음직한 모습의 배가 한참 전부터 꾸물거리는 모습을 보이어 신경을 거둘 수 없게 한다.
레이더는 1.5노트의 속력이 있다고 표시해주어, 조심스레 녀석의 꽁무니 쪽을 통과하려고 침로선의 약간 왼쪽으로 돌려가며 접근을 시작하였다. 충분한 안전거리를 가지고 옆을 지나치며 살펴보니 내가 70년대에 탔었던 것 같은 원목선이다. 원목도 갑판에까지 가득 실려 있는데 두 개의 흑구(*주 3)를 올리고 있음을 보니 운전이 부자유한 상태로 드리프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구명정도 우리 배와 마찬가지로 오픈 타입의 옛날 식 구명정이다. 운전부자유선을 표시하는 흑구 두 개를 올리고 닻은 내리지 않은 게 아마도 고장 난 엔진 수리를 하느라고 그럴 것이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선미에 한 사람이 나와 인기척을 보이며 가까이 지나치고 있는 우리 배를 올려서 쳐다본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그 사람의 심정은 얼마나 우리 배의 사정이 부러울까?
예전 황천 속에서 배에 수침(水浸)이 되는 사고를 당해 펌프로 물을 퍼내는 비상상황으로 항해를 하고 있던 때, 우리 배 옆을 유유히 지나가든 커다란 배를 보며 부러워했던 시절이 겹쳐져 기억에 떠오르고 있다. 경하 상태인 우리 배의 브리지 높이에서 내려다 보이는 그 원목선 후미는 어떤 산 정상에서 저 아래 한참 까맣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조그마한 오두막집 지붕이라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 준다. 목을 길게 뽑고 머리를 들어 우리를 쳐다보는 저 선원의 심정은 최소한 길 아래서 높다란 성벽의 베란다라도 올려다보는 것 같으리라.
햇빛이 눈부셔서인가? 그 사람은 그냥 머리를 돌리어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때 그 배의 연돌(*주 4)에서 검은 연기가 불쑥 솟아오른다. 고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돼가는 모양이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 배가 무사히 수리를 끝내고 어서 이곳을 떠나가기를 빌어준다. 이곳은 천소로도 악명이 높지만, 인간 말종의 악당들인 해적이 종종 출몰하는 별로 안전하지 않은 해역을 부근에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각주
*주 1 - 천소 (淺所 : shallow water area) : 주변 해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구별되어 나타나는 얕은 수심 구역을 말한다
*주 2 - 말라카 해협에 놓인 모래톱으로 선박들의 좌초를 막기 위한 등대가 서있다. 1 Fathom은 수심 단위로 6 fts, 즉, 1.8288m에 해당한다. 실제 ONE FATHOM BANK의 수심이 1 Fathom인 것은 아니며 조고에 따라 차이가 생김
*주 3 - 국제충돌예방규칙 4조 1항에 따른 운전부자유선의 주간 형상물 : 운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선박으로 동력선인 경우에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제2조 제1항 제1호 및 제2호의 규정에 따른 등화 대신에 적어도 2해리 떨어진 주위에서 시인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진 홍등 2개를 1.83미터(6피트) 이상의 간격을 두고 수직선 상의 상하에 계양하여야 한다. 주간에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직경이 0.61미터(2피트) 이상의 흑구 또는 흑색의 형상물 2개를 수직선 상의 상하에 1.83미터(6피트) 이상의 간격을 두고 계양하여야 한다.
*주 4 - 연돌(funnel) : 배기가스를 대기 중에 신속히 확산하며 한편, 통풍력을 일으키는 부분. 일반인들은 대부분 굴뚝이라 부르는 부분이다
*12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