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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r 18. 2021

Ocean Queen과의 해후

스물여덟 살 두리의 마지막 항해 - 10

역전 노장의 모습이 몸에 배인 오션 퀸의 모습. 내가 탔을 때와 달라진 것은 굴뚝에 그려진 회사의 로고뿐이다


엊저녁 어두워지면서 싱가포르를 떠나 밤새 달려서 들어선 말라카 해협의 남동쪽 입구 부근이다.  

뒤에서 열심히 따라오는 배가 오션 퀸임을 알아차리고 VTS zone 치고는 넓은 편인 해역이라 편한 마음으로 추월을 인정해주며 10노트 속력의 달리기를 계속 유지해주고 있다. 싱가포르를 출항할 무렵 VTS에서 쓰는 VHF Ch. 에서 오션 퀸 이란 배 이름을 얼핏 들었을 때 만 해도 같은 이름을 가진 배가 또 있는 걸까? 하면서도 알아볼 길이 마땅치 않아 그냥 두었었다. 


이제 추월을 당하며 보니 1980년대 중 후반에 내가 승선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봤던 그 배가 맞다. 그때와 다름없이 지금도 이 배는 브라질의 투바라오에 가서 석탄을 싣는 예정으로 달리고 있단다. 참으로 반가운 마음 절로 들어선다. 탔던 배와 지금 타고 있는 배로 갈린 두 배 오션 퀸과 두리와의 인연을 각각 살펴본다. 한 배는 한때 오랫동안 타기도 했던 배였고, 또 한 배는 이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주려고 승선 중인 배다. 서로의 가는 길이 극명하게 갈라서고 있는 아이러니칼 한 두 배의 운명을 이곳 말라카 해협의 수로에서 만나며 양쪽 모두와 인연의 끈을 똑같이 내가 매어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남다르다. 사실 그 배와 나와의 인연의 끄나풀은 남다른 점이 많은 너무나 질긴 모습이었다. 


어쩌다 이곳 환하게 빛나는 말라카 해협의 눈부신 태양 아래서 해후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마침 그 배의 당직 항해사가 추월하기 위한 서로의 의도를 타협하려고 VHF로 우리를 부른다. 본선 좌현 쪽으로 추월하기에 동조해 주기로 한다. 같은 한국 배이고 기왕지사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서로의 사정이나 알고 싶은 점들을 이야기하며 통항할 수 있는 기회가 이어진다. 


나도 전화를 바꿔서 그 배의 사정을 물어보기로 한다. 혹시 옛 인연과 닿아 있는 사람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저 기대로 끝난다. 사실은 내가 전화를 바꿔서 나가니 상대방이 나의 존재를 버겁게 느꼈음인지 전화의 응대가 너무 공손하게 변하여 말을 더 걸어 보기가 민망하여 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두 배의 상황을 잠시 비교해 본다. 두리호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조선 실력이 앞섰던 일본의 조선소에서 1980년에 신조되었고, 오션 퀸은 1987년도 거제 대우조선소에서 야심 차게 만든 배로 당시 범양상선에 인계되었는데 첫 항차 대서양에서 황천에 조우하며 외판이 상하는 고통도 겪으며 수리를 통해 재정비해가며 성장해 온 배다. 


바다 위에서 참으로 가깝게 만나는 지금 이 순간에 이르러 두리는 여섯 군데의 선주 품을 드나들며 오대양을 누비다가 마지막 순간으로 인간에 대한 봉사를 끝내려 하는 중인데 오션 퀸은 아직도 현역으로 뛰려고 열심히 선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 오션 퀸에 처음 승선하려 회사와 미팅을 가진 자리에서, 바람 만나면 꼼작 못하는 배이니 바람은 미리미리 피해 다니라는 우스개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탔었던 오션 퀸 호를 지금은 이렇게 건재한 모습으로 우리를 바짝 쫓아와서 5 케이블 정도의 사이를 주면서 추월해 앞서 나가고 있는 모습으로 보면서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열심히 그 배를 건너다보며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꽝’ 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건너편에서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 카메라를 내리며 확인하니 마침 코앞을 지나듯 가까이 지나는 그 배의 9번 창에서 무슨 일이 있어 수리하며 내는 소리라는 걸 알아챘다. 


9번 창 해치커버가 활짝 열려있는 걸 보니 거기서 나는 소리라는 걸 금세 알아 버린 것이다. 내가 타고 있던 시절에도 종종 선창 내의 수리를 위해 항해 중에 해치커버를 열어 놓고 항해한 적이 많았다는 기억이 살아나 빙긋이 미소를 띠워준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를 앞에 두고 갑자기 그가 가졌던 다정한 예전 버릇을 생각해 낸 것 같은 아스라한 따사로움이 묻어나는 느낌이 들어 잠시 그때로 돌아가 보게 한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었다 하면 그 지나쳐가는 휭휭거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듣기 싫어서 귀를 틀어막아 보던 때도 있었건만 이제는 그런 일조차 다 용서해줄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의 페이지에 머무르고 있다. 


오션 퀸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진짜로 극적이지만 은밀한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한밤중 인기척에 깨어났을 때 목에 칼을 들이대는 해적을 만났던 기억이다. 

남아공 리처드 베이에서 석탄을 싣고 순다해협을 통해 인도네시아로 들어섰고 보르네오 서쪽 적도 해역을 북상하던 그때 메인 엔진 터보 차저  한 대가 고장을 일으켜서 감통 운전을 시행하며 귀국 항해를 하던 깜깜한 그믐 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들은 작은 배로 접근하여 배 안으로 침입한 후, 문을 잠그지 않고 잠들어 있던 내 방에 스며들었다가 기회를 보아 나를 덮쳤던 것이다.


-굿모닝 캡틴, 


이런 인사말로 여유를 잡으며 나를 깨운 이들은 대항하기를 포기한 나를 향해 금고문을 열도록 하였고 그 안에 있던 돈과 내 사물함에 있던 지갑과 시계 등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져 갔던 것이다. 내 삶에서 추억하기 싫은 기억 중 하나이다. 터그보트가 밀면서 셍긴 선체 외판의 군데군데 페인트 까진 자리를 무슨 훈장처럼 보이며 오션 퀸은 역전 노장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두리의 옆을 지나쳐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그까짓 조무래기 해적 따위에 당했던 일일랑 잊고 떨쳐 버리라는 듯 무심하게 앞서고 있는 오션 퀸 그녀는 앞으로도 27일이 더 지난 5월 8일쯤에 브라질 투바라오에 도착할 예정을 가지고 있단다. 


말라카를 빠져나가 인도양을 가로질러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오른쪽으로 두어 다시 남대서양을 건너가서야 도착하게 되는 대 장정의 항해인 것이다. 사실 두리가 더욱 사정이 나쁜 축이라 그렇지 오션 퀸도 또래의 배들 중에 그렇게 빠른 축에 드는 성능을 가진 배는 아니다. 당시에 나는 이렇게 긴 항해를 그저 끈기로 버티며 항해를 억지로 즐기듯이 생활해 왔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조를 받아서 8.5노트에 허덕이며 달리는 두리를 11.5노트의 스피드로 앞서가며 옛 추억의 모습을 ‘꽝’하는 소리까지 곁들여서 정겹게 전해주며 어느새 저만큼 앞서 나가는 그녀에게 안전 항해를 빌어준다.

두리호를 앞질러 앞서 나가기 시작하는 오션 퀸의 모습


*11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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