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 돼지 머리를 삶아 내어
배를 타는 선원들에게 지루한 항해의 고달픔도 잊고, 새로운 기를 충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게, 적도를 통과하는 항해에 맞닥뜨리면, 하루를 휴무로 하여 일반 과업은 쉬고, 적도 통과하는 간단한 의식도 치러가며 즐길 수 있도록 회사도 내규로 보장해 주고 있다.
내일이면 그 적도를 남양에서 북양으로 올라가며 통과할 예정인데, 그 행사를 하루 앞당겨 오늘 지내기로 한다.
사실 적도의 통과를 정확히 따져 본다면 월요일인 내일 19 시경이 되겠지만, 월요일을 휴무하면서 이틀을 쉬게 하기에는 중단 없이 이어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우리 배 사정으로 볼 때 일할 시간이 너무 빠듯해지는 형편이다.
그래서 선원들의 주어진 휴일을 빼앗는 결과이긴 하지만, 앞으로 갑판에서 해야 할 바깥일을 할 수 없는 궂은 날씨가 생기면 대신 쉬게 해주겠다는 언질을 주고 양해를 구해 바꾼 것이다.
돼지머리를 가운데 두고 배에서 차릴 수 있는 나물은 무치고, 생선은 굽고, 과일까지 구비하여, 브리지와 기관실 두 군데에 각각 배치해 놓고, 무종교인 사람들은 기적을 울리는 시간에 절을 하며 식을 지내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그냥 참관한 후, 나중 뒤풀이로 먹는 일에만 참여하라고 안내한다.
본선 선체의 나이를 사람으로 치면 60대를 넘어선 연세와 같으니, 자주 소소한 사고가 일어나고 고장도 잦기에 사실 그런 점들을 해결하여 모든 항해와 정박과 작업을 무사하게 해주십시사. 하는 마음을 은근히 품고서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항상 안전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도록 지시하며 이 행사를 안전제일을 외치는 행사로 주관해주고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 행사 자체를 미신이라고 터부시 하며, '적도제'라는 이름 자체를 싫어하는 선장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회사에서도 적도를 통과할 때는 하루 일과를 쉬게 해 주고, 선원들 주부식비 반 일분의 한도 내에서 음식도 차려서 행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일종의 해상 생활의 관행으로 본다면,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지 않아도 되는 데 하는 것이 내 견해이다.
더구나 배의 항로에 따라서는 남북으로는 별로 다니지 않고 동서로만 다녀서 날짜 변경선은 자주 다녀도 적도를 통과치 못하고 장기 항해를 하는 배의 억울함(?)을 감안해줘서, 날짜변경선인 180도를 통과할 때도 적도 통과와 같이 하루를 쉬고 음식을 차려 먹을 수 있도록 회사가 배려해주고 있는 데도 말이다.
지난 항차에는 냉동한 돼지머리인 것을 깜빡 잊고 있다가 행사 시간에 바쁘게 대어서 준비했던 관계로 결국 제 때에 돼지머리가 푹 삶기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였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미리 시간을 두고 어제 아침부터 은근한 불에 삶기 시작하여 알맞게 익은 돼지머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그 돼지가 입을 벌리지 않고 꼭 다물고 있다. 돈을 입에 물리려 했으나 잘 안되어 억지로 시늉을 하며 3만 원이란 돈을 모아 물려주었다.
이 돈은 행사를 끝낸 후 이 일을 치르기 위해 가욋일(?)을 수고한 조리수에게 건네주는 선원들의 작은 성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어차피 자신이 해야 할 일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남보다 가욋일로 더 하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는 적도제의 상차림이다. 혹시 그런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더라도 이렇듯이 주위 동료들이 자그마한 성의를 표시해주면서, 선원들 스스로 서로의 화합을 알고 생활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 은근히 권장해보는 일이다.
어쩌면 적도제 자체를 너무 미신의 행위라고 백안시하려는 일부 선원들에게 결코 그런 행사가 아닌 선상생활에서 필요한 일종의 활력소로 봐주십사 해주고 싶어 적도제를 치를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리 하려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