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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아낌없는 협조를 구합니다

약속의 지킴

by 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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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사회가 복잡다단 해지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의 규약과 법령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 가지면서 사회생활을 해오고 있다. 이런 규약이나 법령은 우리들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공감하기에 정해 놓은 것으로서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모두의 약속인 것이다.


사실 법령이나 규약들은 대부분이 하지 말라는 쪽으로 정해진 것들이라 심성적으로도 제대로 지키기 싫거나 힘들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도 어기지 않고 따름으로서 사회 질서를 지키며 서로 간의 다툼을 없이 할 수 있는 원칙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너무나 딱딱할 정도로 법대로 따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융통성이 없다며 비웃음을 던진 적도 제법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융통성이란 것은 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가장 방해가 되는 약점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지난 시드니 올림픽 때였습니다. 아직도 많은 차량이 주차할 수 있는 주차 공간이 남아있는 시내 복판의 한 주차장에 들어서려는 차량을 단지 그곳에 주차할 자격이 없는 차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막아서는 단속원을 보며, 많은 올림픽 방문객들은 융통성 없이 법을 집행한다고 툴툴거리며 다른 주차장을 향해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 주차장은 올림픽 자원 봉사자들을 위해 준비해 둔 주차장으로 아무리 주차 공간이 남아돌아도 자원봉사자 이외의 사람은 그 누구도 사용할 수가 없다는, 예외 없는, 원칙을 끝까지 지키고 고수함으로써 불법에 타협하거나 편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편리나 이익을 추구하려는 융통성이나 요령이 아예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즉 준법만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풍토를 전통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우리가 뉴캐슬에서 자주 이용하던 워커스 클럽이 예전에는 칼라가 있는 준 정장 차림을 해야만 입장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고 멋진 캐주얼 옷을 입었더라도 그것이 칼라가 없는 옷이면 불허하던 그들의 너무 빡빡함을 비웃어주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웃음이 진짜로 정당한 것이었을까요? 융통성이나 요령이 인간 세상에 필요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 자체가 목적으로 변질된 것 같은 우리 한국 사회의 병폐로 보건대, 법이나 규범은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지고, 또는 요령을 가지고 누르거나 피해 가는 자 만이 잘난 사람으로 보이라고 있는 것 같이 되어 버렸기에, 그런 비웃음을 띄울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구촌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가 다 한 길로 통하는 세상이 되어 가는 데, 아직도 요령이나 융통성만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 여기고 친해보려 할 때, 일시적으로는 이익을 보거나 편리함을 챙길 수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인해 세계 안에서 잃는 것이 더욱 크고 많을 것이란 우려가 결코 우려만으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승선하고 있는 배에서도 이렇게 원칙을 벗어난 관례가 버젓이 행해지는 게 몇 가지 보이고 있어 이를 원래대로 되돌려주기 위해 이렇게 거창한(?) 말을 늘어놓아 보는 것입니다.

새삼 잘하고 있는 배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듯 원칙을 따지고 덤벼드는 것 같지만, 이대로 간다는 것은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여겨서 고쳐 보고픈 마음입니다.


원칙대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 같은 생활방식으로는 제법 힘이 들고 어려울 수도 있지만 모두가 제대로 고쳐지기만 한다면 훨씬 좋은 선내 분위기를 가진 우리 삶의 명랑한 터전이 되리라 믿어 여러 사람의 양해를 구하려는 의도로 몇 자 더 적어봅니다.


첫 번째 이야기.

지나간 삼십여 년을 배만을 타면서 <브리지 출입 시에는 단정한 복장과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한다>는 전통을 지키느라 나도 고생깨나 했습니다.

승선 생활 삼십 년이 될 무렵, 너무 그런 딱딱한 전통에 얽매이기보다는 고쳐 나갈 수 있는 것은 고치자는 의미로 단정한 복장이야 말릴 필요가 없지만, 신발만큼은 무좀도 생기고 하니 통풍이 잘되는 신발을 신어도 되게끔 바꿔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기 위해서라도 뒤축을 꺾어 신은 신발이나 뒤축이 없는 슬리퍼 종류를 착용하고 출입하는 것은 불허한다는 내용을 알리고 브리지 출입문에 공고문까지 붙여 놓았지만, 아직도 불가 판정의 신발 상태로 브리지 출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번째 이야기.

작업복을 입고 식탁에서 식사하는 예절은 이미 예절이 아닙니다. 배가 좀 낡았기에 늘 상 작업복 차림으로 생활해야 하는 고충은 알고 있지만, 최소한 식사를 위한 시간만큼은 작업복이 아닌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식탁을 찾아 스스로를 자존 하는 의미도 세웠으면 합니다.

주갑판 통로에 준비된 탈의실을 적절히 이용하여-필요한 사항은 회사의 지원을 요청해서라도-옷을 갈아입는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깨끗하게 거둘 수 있는 선내 환경을 만드는 첩경도 함께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

본선에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스스로 정한 규정의 하나로 작업복 세탁용 세탁기를 지정했습니다.

따라서 작업복 세탁을, 일반 세탁기에서는 어떠한 이유를 들어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된 것입니다.

혹자에 따라서는 내 작업복은 기름때가 별로 안 묻어 그렇게 더럽지 않은데 일반 세탁기를 좀 쓰면 어떠하랴 하는 의문도 갖겠지만, 그런 발상 자체가 이미 지정 세탁기를 만들어야 했던 취지를 역행하는 일이 아닐까요?

선의의 제삼자가 그렇게 세탁되는 당신의 작업복을 보면서 자신도 세탁기를 구별 안 하고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지키자고 약속한 것은 그대로 지키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피해보려는 것은 서로 간의 믿음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네 번째 이야기.

후부 갑판에서 드럼통으로 만든 소각기로 기름걸레 태우기를 필요에 따라 시행하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금지된 일로, 이는 엄연히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로써 관계당국에 적발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벌과금이나, 체벌도 가능한 일이란 걸 간과하고 있는 듯합니다.

당장 일하기가 손쉽고 보는 사람이 없다고 그런 행위를 무단히 계속한다면 환경오염에 끼칠 악영향이 쌓여서 결국 그 불이익은 후손을 포함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씨는 뿌린 사람이 뿌린 대로 거두게 되어있으니 말입니다.

멀리 그런 점 외에도 당장 법률 위반으로 관계 당국에 적발될 경우, 그때는 이미 두고두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한탄할 일로 찾아 올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단지 배의 상징적인 선주 대리인이라는 명목상 이유로 그 일에 대한 최고의 책임추궁을 당하기는, 정말로, 싫습니다.

따라서 다음 항차부터는 그런 처리 방법이 아닌 적법한 방법으로 처리되기를 강력히 요구하며 관계자님들의 아낌없는 협조를 구합니다.


다시 한번 부연하지만, 지키자고 약속한 것은 그대로 지키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피해보려는 것은 서로 간의 믿음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일을 원칙대로 실행하는 길을 최우선으로 하는 생활을 실천해 봅시다.

위와 같은 취지의 회람을 승조원들에게 돌리어 서명을 받으며 마무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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