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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8. 2024
설숲에서 울다
폭설 뉴스가 하루 종일 이어진 어제, 나는 보고 싶은 이들을 만나겠다는 생각 하나로 예정대로 길을 나섰다. 다행히 고속도로 상황이 나쁘지 않았고, 을지로에서의 망년회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가는 마지막 광역버스에 몸을 실었다.
40분을 달려 집 근처에서 내린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집을 나설 때도 이미 모든 것을 하얗게 덮고 있던 눈은 그동안 쉬지 않고 내린 듯했다. 바닥에 쌓인 눈의 두께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며 부츠 안으로 눈이 스며들었다. 자정을 10여분 앞둔 시간, 거리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상가가 밀집된 아파트 정문 쪽과 달리, 후문 끝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평소에도 무척 한산하다. 메인 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도 없다. 그래서 나는 평소 이 애매한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10분을 걸어간다. 두 아파트 사이의 작은 숲길을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 탄천 돌다리를 건너 다시 계단을 오르면 우리 집이 나온다. 큰길을 따라가도 되지만, 나는 반드시 이 경로로 다닌다. 이 길이 말로 다할 수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봄가을 숲길의 풍경은 나를 매번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깊은 밤, 큰 눈을 맞으며 혼자 이 길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순간 고민이 됐다. 대로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숨을 고르고 숲길로 들어섰다. 이 길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다만 눈 덮인 풍경에 낯설어하는 내 마음이 나를 주저하게 했다. ‘저 들어갑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작은 숲에 허락을 구하며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눈부신 설경 앞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고 말았다.
그렇게 하는데 이유 따윈 없다는 듯 맹렬하게 쏟아지는 눈, 그리고 이를 묵묵히 받아낼 수밖에 없는 나무들. 눈의 무게에 축 처진 나뭇가지, 그리고 눈으로 다 덮인 아직 어여쁜 단풍잎. 자연의 거침없는 모습, 그 무자비함, 그리고 그럼에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무들은 얼마나 애쓰고 있을까? 어머니 나무들은 어린 나무들에게 정신없이 메시지와 에너지를 보내고 있겠구나… 한 그루의 나무는 최대 만 그루의 나무와 소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 6개월 전 다녀온 아이슬란드에 대한 그리움이 눈 폭풍처럼 몰려왔다. 황량한 아이슬란드의 자연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도 모르게 기도하며 두려움을 삼켰던 기억. 바람, 땅, 산, 그리고 내 발소리가 들리던 고요한 순간들.
나는 그저 빨리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무서움도 잊은 채 숲 속에서 꼼짝없이 서서 울고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가 오고 나서야 시간을 보니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마술에서 깬 듯 그제야 한기가 느껴졌다. 우산도 장갑도 가방 안에 그대로였다.
글방 커뮤니티의 오늘의 쓰기 주제는 '한 달간 살고 싶은 나라'이다. 한 달간 살고 싶은 나라라… 물론 아이슬란드다. 사실 나는 아이슬란드의 겨울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5월의 아이슬란드는 이미 충분히 좋았다. 계절상 초여름이었지만 사계절을 모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의 겨울은 너무 춥고 어둡고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다시 간다면 겨울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 이민자 출신 아이슬란드 여성에게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겨울이라는 말을 들었다. 모든 이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을 교환하고, 집집마다 촛불을 밝히는 12월의 마지막 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반드시 겨울의 아이슬란드를 경험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큰 아들이 열일곱 살이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는 3년 후에 나는 아이슬란드에 다시 갈 것이다. 자연을 더 깊이 느끼고, 현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때도 나는 걸을 것이다. 더 당당하게, 더 자유롭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