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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Dec 30. 2018

42. 또 한 번, 거저먹는 나이.

예년보다 따뜻해서인지, 연인 없이 홀로 맞은 크리스마스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점점 빠르게 흐르는 시간 탓인지,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을 보내다 갑자기 코끝이 시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다.


나이를 먹는 일. 내가 애쓰거나 노력 않아도 별 이유 없이 새해가 되면 거저 한살이 더해진다. 늙어가는 일처럼 그냥 이룰 수 있는 일이 또 있나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모두가 공평히 늙어서일까? 대체로 뭐든지 더 많은 쪽을 선호하지만 나이에서만큼은 적었던 과거에 열광한다.


어릴 때야 19년이란 시간이 어쩜 그렇게 굼벵이처럼 기어가는지, 하루빨리 늙지 못해 안달이었다. 19금 빨간딱지가 붙은 성인 만화와 영화를 동경했다. 물론,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봐왔으나 가슴 졸이지 않고 당당히 보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우아하게 커피도 한잔, 호방하고 얼큰하게 술도 여러 잔 마시게 될 공식적으로도, 또 내면적으로도 성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했다.


어릴 적 상상 속에서 성인이 된 나는 완벽하게 완성된 모습으로 그려졌다. 고로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는 것은 많아지고(모르는 것은 점점 없어져 언젠가 모르는 것 따위는 몽땅 없어질 테고), 더 똑똑해질 거라고. 모든 문제는 척척 해결되고, 생활은 점차 안정을 찾아 불안할 일 없이 평생토록 행복하기만 한 동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점차 풍요로워져 더욱 아름답게 빛날 거라고.


어리광 피우기엔 좀 늙어버린 올해의 나는 작년 이맘때의 나보다는 더 나은 인간일까? 아니 1년은 너무 쏜살같으니,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2년 전, 5년 전, 10년 전, 하물며 고등학생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나는 과연 더 멋있을까? 어느 순간부터는 내내 그 자리에 머무는 것만 같다.


모르는 것은 갈수록 늘어난다. 제대로 알아가는 건 없고, 확실한 건 내가 아는 게 없다는 사실 정도가 유일하다. 아마 평생 무엇 하나도 참되게 알지는 못할 것 같다. 주변의 다들은 특정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로 꽤나 성장 궤도에 오른 듯하다. 태생적으로 욕심쟁이인 본인은 20대 내내 여기저기 기웃대느라 어디에서도 여전히 어정쩡한데, 아마 평생 어정쩡할 것도 같다.


어쩌면 되려 지나버린 과거의 내가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적어도 그땐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정해진 체계 안에서 다양한 보호(혹은 감시)를 받아 삶은 예측 가능했고, 안정적이었다. 두 번 다시 그때처럼 고민 없이 편안 할리 없을 거란 점에서 어린 시절 상상의 현실화는 물 건너 간지 오래.


최근 들어 느낀 점인데 나는 예전보다 욕심과 참을성은 준 한편, 의심은 부쩍 늘었다. 나에 대한 기대가 줄면서 내 모습에 스트레스받는 일도 줄었으니 정신건강은 한결 쾌활해진 것도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난달에 신나서 산 책 3권 중 2권은 아직 봉투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나태한 자신이 크게 한심스럽지 않다. 또, 도시 빈곤이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라는 생각에 잠시 잠깐 흥분해서 열분을 토하다가도-아는 게 없으니 열분도 기껏해야 4분 정도다.-연말의 흥겨운 분위기에 휩쓸려 이토록 추운 겨울날 그들의 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에 대해선 어떤 공감도 없다. 나야 크리스마스, 캐럴, 맛있는 음식, 위스키, 쇼핑에 둘러싸여 마냥 즐겁고 흥겨울 따름이다.


검색해보니 관련 도서는 거의 없고, 논문들뿐. 1,400원 결제해서 한번 읽어보면 될 텐데, 커피 한잔의 반의 반값인데도 덜컥 결제하지 못한다. 그러고는 집 앞 별다방에서 5,200원을 내고 따뜻한 바닐라라떼에 샷까지 추가해서 벌컥벌컥 마시는 나의 평화로운 하루에 만족한다.


나만 따뜻하고, 즐거우면 만사에 큰 불만이 없다. 그러니까, 그러면, 결국 모순이 가득한 사회는 쭉 모순투성이일 텐데, 그러니까, 그래도, 일단 나는 이 사회도 꽤나 살만해서 그냥 그러려니 해버리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러면, 누군가의 집은 여름엔 뜨겁고, 겨울엔 얼어붙을 텐데, 그러니까, 그래도, 나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덥거나 추운 날엔 1년 차 때 뽑은 아담한 붕붕이를 끌고 다니며 실외로는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는다.


실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모르니까 금세 포기다.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부족한 자신에게 실망은 없다. 내가 부족하단 사실에 무뎌진지 오래라 자신이 특별하거나 특출 날 거란 기대가 없거든.

지금의 나로서는 언젠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깨달으면,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일-분명 대단한 일은 아닐 테지만-만큼은 확실히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길 바라는 게 다다. 그러니까 올해의 나는 어떤 의미 있는 일도 하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못했을 뿐이라 여전히 쾌활하다.


참을성이 줄어드는 자신에게는 나 조차도 깜짝 놀란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을 때 불쑥 끼어들고 만다. "아 무슨 말할지 알 것 같아." 혹은 상대방이 주제에서 벗어나면 다시 한번 콕 집거나 정리해 버린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의미인 거지?"


'아'다르고, '어'다른 법이니 내 짐작이 틀릴 수 있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기도 할 텐데 중간에 불쑥 끼어드는 일은 해선 안될 일이다. 요즘 들어 사람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전날 나의 언행이 부끄러워지는 날이 많다. 아무래도 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않으려다 보니 이상한 말이나 나불거리고, 오버하게 되어 되려 실수 연발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조차 내 본질을 그대로 보이지 못하는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지만 어떤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역시나, 확실한 건 아는 게 없다는 사실뿐.)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의심이 많아졌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그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말 믿는 몇 명을 제외하곤, 그 누구의 말도 진실 같지 않다. 다들 항상 너무 의심 없던 나를 걱정하곤 했는데,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모두를 믿던 과거가 속은 분명 편했다. 모두의 말이 진실이 아니어도 아무런 상관없지만, 진실이나 진심이 오가지 않는 대화로-물론 의심병이 도진 나의 오판일 수 있으나-시간을 보내는 일은 유쾌하지도, 건설적이지도, 의미 있지도 않아서 지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만나는 사람이 준다.(더 줄 친구가 남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 줄어 이제 남은 인원은 거의 다 피 섞인 사람들이다.) 아! 물론, 그들만 탓할 건 아닌 게 나 역시 의미 없는 말을 마구잡이로 나불거리고, 그런 시간은 여지없이 후회하게 되는 탓도 크다.


이렇게 또 한 번, 다신 돌아오지 않을 2018년 한 해가 끝난다. 더 나아졌는지, 뒷걸음질 쳤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모로 변한 건 분명하다. 앞으로도 이모저모 변할 테고, 후회할 테고, 때론 힘들고, 행복하기도 하겠지만 어릴 때처럼 대단한 사람까진 아니어도 자신에게 부끄럽지는 않은 사람이 되길 꿈꾼다.


내년 한 해 나의 소소한 목표는 건강해지고, 지금보다는 조금 더 아는 게 많아지는 것.(그래야만 먼 미래가 될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꼭 하나쯤은 생길 테니.) 소소한 소망은 우리 가족 다들 아프지 않고, 많이 웃고, 피가 안 섞인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좋아(사랑)하고, 그 사람도-모순덩어리인-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도 같다.

써놓고 보니 꽤나 거창하지만, 목표와 소망은 원래 그러한 것.


정말이지 격동적이었던 2018년. 이젠 완전 쫑이닷!!!! (bgm: 클래지콰이의 She Is)


-끝.-

정영주 화백의 두 작품 <푸른 밤>, <사라지는 풍경>을 프린트베이커리에서 디지털 판화로 판매하길래 언젠가 꼭 구매하고 팠는데 어느새 sold out이다. 그녀의 작가 소개는 간명하다.

"도시 빌딩 숲 사이에 숨겨져 있는 판자촌을 발췌하여 풍경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도시 빌딩 숲 사이에 숨겨져 있는 판자촌'을 작품으로 남기는 그녀의 진심을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언젠간 그녀처럼 할 수 있는 일 하나쯤 꼭 생겼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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