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맞아 고향이자 할머니가 계신 부산에 다녀왔다. 해운대에 살았던 지라 꼭 한 번은 그 동네를 들리는데, 구 남친은 현재 이 동네에 살고, 전전 남친도 부산 출신이라 어느 명절엔 함께 내려와 이 바다를 거닐었더랬고, 어느새 밥친구가 된 전전전 남친과는 여행을 오기도 했던 터라 이 동네에선 그저 우습고 재미난 유년시절 추억뿐 이였는데 어쩌면 없었어도 그만인 여러 기억이 함께 떠올라 예전 같은 애틋함은 줄어버렸다. 재잘재잘 옛이야기를 나눌 동생과 함께가 아니라면 큰 의미 없는 동네가 되고 말았어. 그래도 여전히 기억하는 초등학교의 교가를 신나게 불러대며 동생과 웃어댄다.
금세 지 편한 쪽으로 적응해버리는 약삭빠른 몸뚱이는 부산의 따뜻한 봄바람에 며칠 새 익숙해진 탓에 아직 겨울인 서울의 바람에 한껏 움츠려 든다. 생일 축하 식사, 약속 날짜를 조정하기 쉽지 않아 신년회까지 밀리고야 만 송년회 등으로 답지 않게 약속이 촘촘했다. 어느 날엔 두 탕을 뛰기도 했다. 그중 의미가 남달랐던 두 개의 모임.
우선, 입사 동기 3조 모임. 남초 회사인지라 입사 초 연수원 시절 각 조마다 여자는 딱 한 명씩 배정됐다. 크게 뛰어나지도 않지만(아니 그들은 내 수준에 눈높이를 맞춰준 걸지도ㅎㅎ) 특별히 까다롭거나 모나지도 않은 사람들만 운 좋게 모인 3조는 우리 기수 중 여태 주기적으로 모이는 유일한 팀이다. 참 감사할 따름. 어느새 오빠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다 아빠들이 됐다. 유일하게 유부의 다리를 건너지 않고 남아있던 한 명도 예랑이로 등극. 이제 막내의 뒤처리를 부탁해 오빠들. 작년 이맘때쯤 딸내미가 생긴 한 오빠가 이번 송년회 겸 신년회를 무려 집들이로 기획했다. 그래도 1년에 2~3번은 꼭 봤었는데 작년엔 다들 모이기가 쉽지 않아 정말 근 1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근황들을 나누다가 요 근래 겪은 황당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요약하자면 나를 좋아하던 남자가 있었고, 난 그 사람이 너무 순진하고 감수성이 남달라 보여 호감이 생겼는데 그 이상의 감정은 생기지 않아 정리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자 엄청-더럽게-밝히는 문어다리라는 후문. 그를 따라다니는 여자가 꽤 있단 점은 더욱이 이해 안 가는 부분.)
그 남자가 여자를 밝히는 게 놀라웠던 건 아닌데, 전 여자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했던 이야기, 그냥 아무나와 뭘 했다는 이야기 등 본인의 입으로 tmi 퍼뜨리는 경솔함에 뜨악했다. 물론 경악 포인트는 평균치를 상회하는 연애경험에도 불구 성장 없는 나의 '보는 눈'. 여태 만난 사람들이 계산 빠르고 현실적인 편이라면 그는 감성적인 사람이라 타인에 더 많이 공감하고, 배려하는 사람이라 예단했던 나의 노답 판단력. 이건 거의 공포다.
소주를 주고받으며 이런 시답잖은 근황 토크를 하다 훅 떠오르더니 몽글몽글 훈훈하게 가슴속에 퍼지는 생각.
안전하다.
이 공간에서 이들과 함께 하는 지금, 나는 안전하다고. 일반적으로 그 누구와도 크게 위험할 건 없지만 완벽히 안전하다고 느끼는 건 드문 일이다. 드문 일인 게 분명한 게, 이런 기분 처음 느껴봤으니까. 아무렇게나 지껄여도, 어떤 실수를 해도 평가받지 않는다. 물론 나 또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훌륭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미 신뢰하고 있다. 이젠 지나온 시간을 함께 쌓아온 사람들이란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토록 두터운 신뢰가 쌓였구나 싶어 놀라운 동시에 오늘, 이 곳에서, 이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나란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했다.
어떻게 설명해도 내가 느낀 감정을 오롯이 전달할 수 없는데, 아주 추운 겨울날 바깥은 펑펑 내린 눈이 쌓여 얼어붙었고, 하루 종일 잠옷 바람으로 집에 틀어박혀 전기장판 위에서 가족들과 귤이나 아이스크림 퍼먹으며 예능프로 볼 때나 느낄 수 있는 행복에 근접한 감정과 유사했다. (사람의 진심을 드러낼 표현이 이토록 부족할 린 없고, 그저 내 문장력이 부족한 걸 테지.)
회사 연수부에서 뺑뺑이 돌려 편성된 우리 조에 배치되어 지금 이 시간을 내가 누려 참, 다행이다. 오빠들은 예전부터 연인들을 소개했고, 결혼 후에도 편히 언니들이나 애기가 참석하기도 하는데 그래야만 이 모임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이 오빠들의 이유다. 결국은 매번 하는 행군 이야기, 연수원 시절 말아먹은 프로젝트 등 항상 그 시절의 흑역사로 회귀하지만, 유일하게 1등 한 동기가(歌) 프로젝트 덕에 우리 기수의 동기가는 우리 3조 작품이다. 모든 프로젝트는 모두의 기억에서 잊혔지만, 동기가 만큼은 우리 기수 모두가 기억하니 어쩌면 가장 값지고 의미 있는 1등을 한 거란 이야기를 나눴다. 바람처럼, 앞으로도 쭉 만나자 우리.
동기들을 뒤로하고 첫 직장을 떠나 함께 고생하며 만들어가던 전 직장의 동료를 만났다. 직급상 나보다 윗분이시고, 경력도 훨씬 높아 배운 게 원체 많지만 상사와 부하직원의 느낌이라기 보단 함께 맞서 싸우는 전우의 느낌이 더 강한지라 동료란 표현을 쓴다. 차근하고 확실하게 입지를 넓혀가는 회사 소식에 정말 많이 기뻤고, 내가 떠난 후 만들어진 업력들을 보며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에 가슴이 뻐근해져 눈물이 핑 돌았다.
같이 고생했던 이야기, 앞으로 해야 할 일들, 궁금했던 서로의 지난 시간을 나누다, "너는 분명, 큰 일을 할 거야. 큰 일을 할 사람이야."란 말을 들었다.
그랬다. 꼭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때의 나도, 과거에 존재했다. 그런 나를 기억하는 동료의 말을 들으며, 지금의 나는 한결 성숙해진 건지, 한심해진 건지 아리송. 애초에 위대한 일이란 개념은 마냥 추상적인데, 당시엔 막연히 기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보다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사회를 만들어 내려했다. 내가. (혼자서 직접은 못할지언정 꼭 기여하게 될 거라고)
사회를, 다수의 타인을, 위한 일을 하려던 나의 꿈이 실은 단지 내가 위대해지고 팠을 뿐이었단 사실이 그저 부끄럽다. 이젠 혼자서 직접 할 수 있는 일 만큼은 착실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옆 사람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부터.
그래도 뭐가 부끄러운지 알 정도로는 변별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조금은 성장한 게 맞는 것도 같다. 이제는 겸손한 나를 꿈꾼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라나는 부끄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줄이고픈 마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