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추는 춤 #제주에서 제주읽기 #알맞은 시간 #만화 #강아지
2월 말, 제주에 도착하여 내가 한 달 넘게 매일같이 겪은 것은 비와 바람이었다. 매일이 흐렸고, 비는 끊이지 않았다. 제주도 바람이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우울한 날씨라니...... 햇빛이 나면 일단 밖으로 나가 광합성을 한다던 영국 사람이 된 것 마냥, 거센 바람에 구름이 살짝 걷혀 햇빛 한 조각이라도 비출라치면 부리나케 창문을 열고 습기 머금은 몸뚱이를 말렸다.
주차별 일기예보는 딱히 들어맞지 않은지 오래다(이것은 기상청의 문제라기보다는 행정구역 상 표선면의 범위가 크고, 한라산자락의 표선면과 바닷가 쪽 표선면의 일기차가 커서이지 않을까 싶다). 제주의 겨울이 항상 이랬냐고 주변 분들께 여쭈면, 올해는 특히 더 심하단다. 몇 차례 여행으로 경험했던 제주 겨울의 흐림과 화창함은 당시의 운빨이었고, 그저 여행의 불편함 뿐이었는데 삶의 현장에 던져진 날씨는 생각보다 내 마음의 날씨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
기억은 실제 경험보다 주관적이니 과연 이것이 나의 우울한 기억에 의해 날조된 편향일까 싶어 기상청 과거날씨를 조회해 보았다. 세상 참 좋아졌다. 앞으로의 예보뿐 아니라 과거의 날씨도 이젠 확인이 가능하다(https://www.weather.go.kr/w/index.do 나만 그랬나? 어렸을 때 방학 숙제였던 일기를 막판에 몰아 쓸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날씨란을 채우는 것이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되겠다! 아 정말 좋은 세상...)!
위의 데이터에서 볼 수 있듯, 비가 오지 않은 날, 쨍한 날도 분명 있었다. 이런 날을 놓칠 순 없지. 비가 잠시 멈추고 쨍한 햇빛이 흐르는 알맞은 시간, 그 곳을 찾았다. 남원읍 신흥리에 있는 이곳은 마을의 공동 창고(아마도 감귤창고)였던 장소가 층고가 높은 멋진 카페로 변신했다. "알맞은 시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카페는 제주스러운 마을의 작은 길을 들어서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이미 다녀간 많은 사람들을 통해 책 읽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이곳에서는 일회용 잔, 빨대, 포장용기를 제공하지 않으며(제주의 카페나 음식점에서 종종 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12세 이상, 4인이하 입장 가능하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기까지 혹여 주변에 피해를 줄까 음식점, 카페를 눈치 보며 전전하던 기억이 살짝 스쳐 지나간다. 만약 "노키즈존"이라고 쓰여있었다면 좀 서운할 뻔했는데, "12세 이상, 4인 이하 입장 가능"은 오히려 이 카페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 고개가 끄덕여진다.
투박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마을 창고임을 기억하라!) 새마을 운동 색깔 같은 초록이 인상적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두컴컴하고도 아기자기한 내부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높은 층고를 가지고 있음에도 공기가 침잠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이곳이 조용한 카페를 표방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돌벽과 나무 재질의 테이블과 의자, 군데군데 놓인 푸른 식물들은 밸런스가 잘 맞다. 돌벽 높은 곳에 달린 창을 통해 햇빛이 스며든다. 이제 책을 읽을 시간이다.
누군가의 서재는 그 사람의 얼굴과 같다던가? 제주에서는 종종 이렇게 서재를 보유하고 있는 카페를 만날 수 있다. 참 반갑다. 읽을 책을 이미 가지고 왔지만, 서재에서 몇 권 골라 읽기 시작했다.
7x4 책장에서 내가 선택한 책은 "너와 추는 춤". 이연수 작가와 개(냇길)의 제주 스토리가 담긴 만화이다. 앉은자리에서 커피도 뒷전인 채 완전 빠져들어 버렸다. 네 컷 만화에 담긴 제주 일상이 이곳, 이 시간과 너무 딱 알맞다. 게다가 긴 긴 비의 제주를 피해 잠깐 햇빛난 찰나에 찾은 이 시기에 읽은 "봄비" 에피소드는 내 마음에 완전 꽂혀들었다. 그래, 나는 제주를 정말 완전히 겪은 거였구나. 괜히 뿌듯한 마음도 든다.
이래서 알맞은 시간인가? 이 시간, 이 날씨, 이곳에서 이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만큼 이 책에 흠뻑 젖어들었을까?
집에 돌아와서 나중에 찾아보니 이 책은 5권까지 출간되었다. (5권은 2024년 5월 25일 발행됨, 따끈하기도 하지!)
책에 대한 더 자세한 소식은 인스타(https://www.instagram.com/natghil/)를 참조하시길...
(참고로 아래 사진은 작가님의 허락을 받아 올린다. 책을 읽다 간혹 만나게 되는 마음에 꽉 들어차는 문구는 메모로 남겨놓곤 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아 찍어 놓은 사진의 경우 당연히 개인 소장용인데, 이 장면은 꼭 싣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작가님께 메일을 보냈다. 한 페이지 정도의 사진은 괜찮다며 흔쾌히 허락해주신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곳을 다녀간 후 남편과 몇 번 카페의 이름을 고쳐 불렀던 것 같다.
"지난번에 갔던 그 적당한 시간 있잖아!"
"아, 알맞은 시간이었던가?"
이날은 정말 내게 알맞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행복해지기 딱 적당한 시간이기도 했다. 커피잔 가득한 카페라떼 우유거품같이 딱 넘치지도 않고, 잔을 꽉 채운 그만큼의 행복.
누군가는 이 자리에 혼자 앉아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기도 했을 테고, 어떤 이들은 둘, 셋이 조용히 담소를 나누기도 했을, 창 아래 앉아있는 그 시간만은 누구와 무엇을 하든 온전히 꽉 채울 수 있는 그런 곳. 무엇을 읽느냐만큼 언제, 어디에서 그것을 마주하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막연하게 책을 많이, 원 없이 읽어보겠다는 생각이 좀 더 체계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마도 이곳에서 발견한 지도의 영향도 꽤 있었던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표독 김선생을 포기하고 사실 약간은 의기소침해져 있었던 것이다!)
제주의 책과 제주의 작은 책방, 그리고 그 책을 가장 멋지게 즐길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남긴다면 어떨까?
앞으로를 기대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