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선도서관 #석면철거 #6월에만나요 #표선해수욕장근 #서귀포
제주를 거닐며 문득 놀라곤 하는 것 중 하나가 의외의 장소에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인데, 표선도서관 주변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깊은 숲 속에서나 들음직한 새소리가 들리곤 한다. 크지 않은 도서관이지만 오래된 책들도, 새로 나온 책들도 내 빈약한 독서량에는 넘칠 만큼은 있다. 친절한 사서선생님이 제주공공도서관과 어플을 사용하는 법을 잘 알려주신다. 이곳은 어린이 서적과 일반 서적이 한 곳에 있어서 또 특별하다. 조용히 서가를 오가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무시로 마주친다. 만화만 모여있는 책장도 따로 있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나는 표선도서관을 거점으로 이곳 책장에 있는 제주의 책들을 표선의 멋진 풍광 아래에서 한 권씩 읽고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부제(가칭)는 "표선에서 독서하기", 필명은 "표독 김선생". 나의 유한 성격에 비해 필명이 주는 느낌이 너무 표독스럽지 않냐고 남편에게 물으니 돌아오는 답이 없다. 음...
남편이 탁송으로 육지에서 차를 가지고 온 이후부터(그전엔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온 가족이 사나흘 걸러 한 번씩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며 빌릴 수 있는 최대 권수의 책(5권)을 골라 집으로 날랐다 반납했다 반복했다. 일 년 살이 짐을 최소화하느라 읽을거리들은 연구과제에 당장 필요한 책 몇 권과 아이들 역사동화 한 질이 전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새로운 읽을거리는 귀했다. 그렇게 몇 주 보내고 나서 이제 책을 좀 골라 글을 써볼까 생각하던 중 도서관 공지가 붙었다.
"표선도서관 석면철거 공사에 따른 임시 휴관 알림 - 2024. 4. 1.(월) ~ 2024. 6. 2.(일)"
어이쿠,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는데 프로젝트의 컨셉부터 흔들거릴 외부 요인이 발생했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저 기간이 만 2개월임에도 불구하고 공지를 본 이후 꽤 오랫동안 3개월로 착각할 정도였다. 12개월 중 3개월이나 집에서 제일 가까운(차로 10분 거리의) 도서관이 문을 닫는다니! 마음이 덜컹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나는 평소 무엇인가 시작하기 전에는 엄청난 설렘 에너지를 가지고 돌진하는 반면, 절반정도 일이 되어가면 처음의 그 마음이 절반의 절반정도로 쪼그라들며 새로운 일을 또 벌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늘 서너 개, 대여섯 개의 일을 벌여놓고 산다. 이런 성격은 아예 시작부터 어그러지는 것에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아직 불도저 같은 추진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기 때문에!
일단, 표독 김선생이라는 필명은 마음속에서 버렸다. 표독 김선생이 되어 표선도서관 사서선생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개인적이고 말도 안 되는 망상이 시작되기 전이라 참 다행이다. 그래, 어쩐지 그 필명은 나를 너무 뾰족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했어, 자기 합리화도 일찌감치 끝냈다. 대신 나의 프로젝트에서의 범위를 넓혀 "제주에서 제주읽기"는 이어가자 마음먹었다.
다행히 이 2달의 휴관기간을 기념하여(?) 표선도서관에서 1인당 도서대출권수를 20권으로 늘려주고, 반납일은 도서관 재개관때까지란다. 도서관 휴관을 앞두고 온 가족이 총 출동했다. 각자 20권씩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신간도서는 선택의 폭이 좁았다. 대신 예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인문학 책들, 대여 불가능한 향토도서 코너에 있지는 않지만 제주와 관련된 여러 책들, 오래되긴 했어도 여행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 여행서적들...... 남편은 경제 서적들을 위주로(1년 휴직, 백수인 것이 많이 부담스러웠나?) 아이들은 만화책과 소설책 시리즈 전체를 몽땅 쓸어 담았다. 와우, 이런 쇼핑해본 적 있으신가? 누가 보면 독서광인 줄 오해하실까 걱정이긴 한데, 여든 권 대여 한도 꽉 채운 책들을 차 트렁크에 옮겨담으며 느낀 부자 같은 그 느낌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다.
"우와, 우리 진짜 부자 된 것 같지 않아?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계산이요!
요런 재벌 느낌으로 책을 빌렸는데!"
나도 안다. 아직 읽지도 않았다는 걸. 원래 책은 읽을 때 채워지는 마음의 풍족함보다 소유할 때 느껴지는 법이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입도한 지 한 달 만에 표선도서관과 잠시 이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