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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 너머 May 28. 2024

[표선에서 책읽기] 여는 말

#제주도도서관#표선도서관#제주1년살이#독서#쉬어가기#안식년

책은 늘 읽는다. 직업 때문에도 읽고, 책모임 때문에도 읽고,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해서도 읽는다. 하지만 새삼 이렇게 여는 말까지 써가며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은 책 읽는 인생에 하나의 여는 장과 닫는 장을 만들어보기 위해서다. 읽는 일은 우리 삶처럼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책을 열고 닫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 읽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행위에 잠시 쉼표를 가져보면 어떨까?


그저 표선, 표선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동네


일 년, 안식년의 장소로 나는 표선을 선택했다. 제주도의 북쪽은 제주시, 남쪽은 서귀포시로 나뉜다. 제주의 남동쪽에 위치한 이곳 표선은 서귀포시 표선면이라는 상위행정구역 명칭을 덧입히기보다는 그저 표선, 표선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동네 같다. 


표선으로 향하는 길은 여럿이다. 제주 공항에서, 혹은 제주항에서 동쪽으로 해안도로(일주도로, 동일주도로, 1132번 지방도)를 따라 함덕, 김녕, 월정리해수욕장, 평대해변을 거쳐 세화해수욕장, 하도 해수욕장, 성산일출봉까지 가면 동쪽 끝에 다다른다. 다시 해안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성산읍을 둘러 만나게 되는 곳이 바로 표선이다. 

사실 제주 시내와 조금 더 빠르게 연결된 길은 번영로라 불리는 97번 지방도이다. 조천읍을 가로질러 구좌읍의 끄트머리 송당리를 살짝 지나 성읍민속마을로 유명한 성읍리에 다다르면, 아! 이제 곧 표선읍내에 도착하겠구나 마음이 먼저 도착한 느낌이다제주국제공항과 제주민속촌(표선읍내, 표선해수욕장을 거쳐간다.)을 오가는 121번 버스가 이 길을 이용한다. 

번영로(97번 지방도)에서 살짝 샛길로 빠져보고 싶다면 99번 지방도 남조로도 있다. 교래자연휴양림, 절물자연휴양림,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이 근처에 있고, 97번 도로보다는 산간지역을 지나는 느낌이 더 든다. 

좀 더 한라산 쪽으로 도전해보고 싶다면 516도로(1131번 지방도)를 살짝 지나가볼 수도 있다. 공항과 표선을 오가는 또 다른 급행 버스인 122번이 제주대학교를 거쳐가며 이 도로를 잠시 이용하는데, 꼬불꼬불한 산길 사이 한라생태숲, 제주마 방목지와 사려니숲길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나는 자주 이용해 보지 않았지만 구좌읍을 깊숙이 지나 비자림, 세화리 다랑쉬 오름, 종달리 용눈이오름을 지나 수산리, 난산리, 신산리를 거쳐 돌아 돌아가는 중산간도로(1136번 지방도)도 있다. 


길은 모두 통하니 어디로 가든 동남쪽 끝 표선에 다다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표선에 자리를 잡고 보니 그 어디도 가깝지 않게 느껴진다. 제주시내, 서귀포시내를 가려면 거의 한 시간은 잡아야 하고, 제주도 북서쪽에 위치한 애월읍, 한립읍은 물론, 가파도행을 위한 모슬포항도 한 시간 반 거리다. 서울에서야 한 시간, 한 시간 반 거리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만 어찌 된 것이 표선에서는 그 시간이 더 멀게 느껴진다. 


"왜 하필 표선으로 가는 거야?"


처음, 표선에서 일 년을 보낼 거라는 말에 제주 좀 아는 지인들이 하는 첫 말은 거의 같았다. "왜 하필 표선에?" 아마도 그저 쉬기 위해서라면 애월이나 월정리 같은 풍광으로 더 이름난 곳도 있고, 초등학생 아이 둘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국제학교가 있는 영어마을이 더 일반적인 선택지로 여겨졌던 것 같다. 워낙 제주에 매력적인 곳들이 많다 보니  제주 사람들에게 표선은 굳이 육지 사람이 아이 데리고 들어와 살만한 그런 동네의 이미지는 아니었나 보다. 


제주로 마음을 정하고, 제주 안에서의 보금자리를 선택할 때의 나만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지만, 빠르게 적응해서 일상을 시작할 수 있는 곳. 쉼의 키워드로 보내게 될 1년은 그 어떤 시간보다 짧지 않을까? 서울처럼 복작 복작한 아파트 단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마당이 있으면서, 마트나 병원, 약국과 같은 생활 편의시설이 있는 읍내(?)는 10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그런 곳. (하지만 살아보니 필요한 것은 좀 더 많긴 했다. 쓰레기를 모아 버릴 수 있는 클린하우스나 재활용도움센터가 얼마나 가까운지, 나의 소울메이트 카페라떼를 만날 수 있는 카세권인지, 차가 없을 때 이용할 수 있는 버스 정류장은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그 버스정류장을 지나는 버스가 설마 하루에 4대 다니는 그런 버스는 아닌지와 같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 말이다!) 

둘째, 산과 바다가 이왕이면 가까이에 있는 곳. 나이 들수록 자연을 사랑하게 된다는 법칙에서 나 또한 벗어날 수 없나 보다. 하지만 미리 조금 알아본 바, 한라산 쪽의 중산간지역은 돼지를 키우는 축사나 목장이 가까워 냄새 때문에 힘들 수 있고, 바다에 가까운 해안가는 가뜩이나 습기 많은 섬, 제주에서 곰팡이와의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사실! 뭔가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있고, 그 어드메쯤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셋째, 작지만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는 교육 공간이 있는 곳. 이 부분은 손흥민을 꿈꾸는 두 명의 축구꿈나무의 강력한 요구사항이 있었는데, 집 근처에 축구할 수 있는 천연잔디구장이 있었으면 좋겠단다(아들들아, 축구만 하다 갈 순 없단다......). 하지만 운동장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이 보내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 제주씩이나 아이들 데리고 간다고 하면 으레 국제학교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찾아보니 제주는 다양한 형태의 교육 방식을 공교육에 적용하고 있었다. 마을생태학교, 문예체학교, 놀이학교, 인성학교, 디지털학교, 미래역량학교, 다혼디배움학교와 같은 제주형 자율학교를 비롯해 최근 떠오르고 있는 국제 바칼로레아(IB) 학교까지, 2024년 3월 기준으로 제주에 있는 110여 개의 초등학교 중 61개 학교가 이와 같은 제주형 자율학교에 해당되었다(제주특별자치도 교육청-교육청안내-제주교육정책 참조: https://www.jje.go.kr). 


조건을 여럿 걸었지만 어째 점점 더 선택이 어려워지는 것 같아 심란하던 순간, 찾았다. 바로 그런 곳. 

IB 학교(아직 IB월드스쿨 인증은 받지 못했지만 후보학교로서 IB 교육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근처에 천연잔디구장과 인조잔디구장이 넓게 펼쳐져 초등학생 축구팀 훈련이 주 4회나 이루어지고 있는 곳! 초등학교에서 중심지, 바다(표선해수욕장)까지 딱 10분 거리에, 버스 노선을 보니 사려니숲길까지 이어지는 바로 그곳이 표선이었다. 


표선에서 내 인생에 흔적 남기기


이렇게 들어앉게 된 표선에서 1년 동안 나는 내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쉼의 기간 동안 가장 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마음 편하게 책 읽기"였다. 읽고 쓰는 것이야 직업 때문 에라도 늘 하는 일이지만, 전공 관련 책 외의 책을 마음 편히 읽는 것은 시간을 따로 내어할 일이었다. 2015년에 시작해 시즌10을 이어가고 있는 책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 함께 읽는 책이 아니었다면, 지난 10년간 어쩌면 소설이나 시집, 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책들은 시간이 나면 읽어야지 미뤄놓을 2순위로 영원히 머물 뻔했다. 

손에 가는 대로 고르고, 내키는 때,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읽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책을 골랐던 마음, 읽었던 그 시간과 장소를 남기는 것. 이것을 1년 동안 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 보니 나의 이 흔적을 누가 흥미로워할까 두려움이 생긴다. (나름 MBA 학위를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내 글의 독자를 철저히 분석하려다 보니, 자신감만 처절하게 사라지는 부작용이......)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읽는 책은 무엇이 대단한가 궁금해지고, 유명인의 독서노트는 이미 아는 그 사람의 향기가 물씬 느껴져 팬심으로 읽게 되는데, 나의 독서노트는 어떤 매력을 가지게 될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은 보편적인 무언가일 때도 있지만, 특정인에게 특이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한다. 가능하다면 나의 이 흔적이 이곳 표선처럼 담백했으면 좋겠다. 나처럼 1년이든, 한 달이든, 일주일이든 쉬어가기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제주의 어느 작은 책방에 우연히 들렸을 때 집어들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쉼이 필요한 어느 날 다시 집어 들고 그때 그 쉼을 기억할 수 있는 그런 흔적이길 바란다. 


1년 제주 머묾의 일기이자, 독서기록장이 누군가의 또 다른 제주 일기로 이어지길 바라며 제주살이를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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