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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 너머 Jun 14. 2024

제주, 캠핑카, 별 보기, 그리고 녹차밭

#별일 없이 살아도 별 볼 일은 많아요  #수망다원

제주에선 녹차를 마셔요


나는 커피 중독자다. 정확히 말하면 카페라떼 중독자. 1일 1라떼 하지 않으면 하루가 약간 밍숭맹숭한 느낌이 든다. 평일 출근 전 라떼는 거의 루틴이었지만 제주에 와서는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일단 집 주변에 걸어갈 카페가 없고(집에 캡슐커피 머신이 있지만 나는 라떼의 핵심은 생우유에 있다고 보는 라떼중독자!), 차를 타고나서도 출근시간에 가까운 시간에 문을 여는 카페는 프랜차이즈 카페밖에 없다. 장롱면허인 내게 제주의 발은 단연 신랑님이시다. 그런데 이분이 커피를 안 드신다. 커피 심부름은 눈치 보이는 일이다. 여러 난관 속에서도 어찌 되었건 1일 1라떼는 오늘도 노력 중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를 둔 남편이 제주 카페에 함께 가서 고르는 것은 주로 핫초코였는데, 그나마도 축구대회를 앞두고 끊었다(프로 아니다. 그러나 몸관리만은 호날두 못지않음). 그래서 이제는 주스와 카페인이 덜 든 차로 바꾸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녹차를 마실 일은 정말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에 여행 와서 몇 번 갔던 곳이 바로 오설록. 차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이 목표다. 녹차 하면 보성이나 하동이 유명하다. 하지만 제주의 유명세도 그 못지않다. 아마 오설록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오설록이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차밭은 제주 드문 드문 있다. 표선만 해도 성읍녹차마을, "오늘은 녹차한잔"이 있고, 서귀포 상효동에도 "서귀다원"이 있다. 그리고 내가 찾은 남원의 "수망다원"도 꽤 큰 차밭이 있다. 차밭이 있는 찻집이 아니더라도 차를 나누는 작은 공간들도 많다. 차를 즐기지 않는 나도 하효동 "모모다식"은 제주살이 동안 꼭 가볼 곳으로 저장해 두었다. 


언젠가 나이가 들어 출근하지 않는 날이 온다면 카페라떼 대신 다도를 배워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커피는 정신 바짝 차리고 일해야 하는 현대인의 텀블러에 담길만한 무언가이지만 차는 이렇듯 배워야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의 허들이 높은,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많아야 배울 수 있는 그런 이미지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내 삶이 이런 여유를 낼 수 있는 상황 아닌가? 제주에 시간을 조각내 여행온 사람들에게 초록빛 가득한 너른 차밭이 한숨 돌리는 여유를 주듯 말이다. 

제주에선 녹차를 마셔요. 마셔봐요.

 

물보라 마을, 수망리의 수망다원


5월 휴일 하루, 남원읍에 위치한 수망다원에 들렀다. 최근 읽고 있는 <제주어 마음사전>에 따르면 이곳 수망리의 옛 이름은 물보라(물우라)란다. 근처에 물영아리오름(물보라오름)이 있는데, 이 물보라오름 앞 마을이라 해서 수망(水望, 한자 표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도 있다. 제주에 여행 와서는 마을 이름까지 더듬어가며 머물지 못해 몰랐지만 이렇게 제주는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곳이다. 


제주의 날씨가 마른날.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그림 같은 날은 바다도 좋지만 중산간의 푸르름도 좋다. 사실 어디든 좋다. 이런 날은 밤이 되면 별도 잘 보일 것 같다. 말차라떼와 말차 아포가토, 말차스콘을 시키고 둘러본다. 수망다원의 녹차는 제주기념품점에서도 종종 보았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도 햇차와 다구들을 구입할 수 있다. 오옷, 그런데 이곳에도 책장이 있다. 


수망다원의 책장


수망다원의 책장은 보는 재미가 있다. 차에 대한 책과 잡지도 있고, 쉼을 되새길 수 있는 책들도, 제주를 이해할 수 있는 책들도 있었다. 책 읽기에도 좋다. 조용히 차를 즐기며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비치되어 있는 밀짚모자를 쓰고 훌쩍 차밭을 산책하러 다녀와도 된다. 야외 정원도 좋다. 날 좋은 날엔 책을 고르는 마음도 보송보송하다. 


수망다원의 책장: 오늘은 이 책으로 골랐어!


저 일력 너무 갖고싶다... 서귀포시 제주어 일력



별일 없이 살아도 별 볼 일은 많아요


이날 여러 책들에서 단연코 한눈에 들어왔던 책은 매력적인 제목으로 한 번, 책의 주제로 다시 한 번, 그리고 작가의 이력에 또 한 번 흥미로웠던 책이었다. 이 책의 두 번째 "별"은 진짜 별이다. 제주에 와서 1100 고지, 새별오름에서 은하수 한번 보는 것이 제주살이 1년 목표 중에 있는데 이 작가님은 무려 제주에서 캠핑카를 몰고 별 보는 이야기를 쓰셨다(별 보기는 한 챕터에만 있다. 제주 별 보기 책으로 이 책을 고르면 안 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와이프를 육지에 유학 보낸 후 집을 내놓고 캠핑카에서 출퇴근을 하다니, 이것이 가능한 삶인가? 가능하니 책이 나왔겠지!


p212 여기서 끝났다면 자칫 비루하고 가난한 투어로 기억에 남았을 텐데, 가이드의 말 한마디가 우리를 가장 비싼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다시 생각해도 백패킹의 매력을 한 문장에 담아낸 명문이 아닐 수 없다. 
"저 사람들은 오늘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잠을 잘 거예요.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늘 우리는 오백만 개의 별 아래에서, 그 별들을 바라보며 잠을 잘 겁니다."


예전에 읽던 책들은 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그 글을 쓸 당시) 사람들의 글이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가 읽는 책을 쓴 작가의 나이가 나와 비슷해지거나 조금 더 많은 상황이 되었다. 삶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풀어가는 것은 나이가 도와주지 않는다. 그 사람의 경험과 그 경험을 바라보는 깊이에 있다. 초등학교 어린이가 쓴 글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아이가 바라보는 시각의 다름과 그 깊이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또래인듯한 정한빛 작가님(선생님)의 이야기는 내가 시도해보지 못한 선택, 그 선택 과정과 결과에서 얻어진 통찰을 전해준다. 


p86 이후로 나는 할까, 말까?' 싶으면 일단 해본다(대신 '살까, 말까?' 싶을 때는 안 산다). 그래야 후회가 없다. (중략) 인생의 끝에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은 이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것만큼 큰 비극도 없다.


p194 언젠가 길 위에서 '인생은 여행이다'라고 느꼈던 적이 있다. '인생은 여행이다'로 끝내기에는 삶이 그리 단순한 것 같지는 않아서 '인생은 나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이다'라고 문장을 고쳐 적었다. 인생은 나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이다. 마음 안 맞는 사람과 여행을 가본 사람은 잘 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동네 뒷산이 싫어하는 사람과 억지로 떠난 히말라야보다 나은 법이다. 그렇게 나는 길 위에서 조금씩 나와 가까워졌다. 나와 거리가 멀면 멀수록 삶은 힘들어진다. 내가 나와 가깝지 않으면, 심적으로 가장 먼 타인과 같이 사는 셈이 된다. 


책에서는 작가님의 버킷리스트(이미 해봤거나, 앞으로 할)를 엿볼 수 있다. 누군가의 버킷리스트는 그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버킷리스트 중 지워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 보다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그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그저 이룰 수 없는,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그걸 행복이라고 인식하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다고 해서 당장 일을 그만두고, 캠핑카를 몰고, 여행자처럼 매일을 살 수는 없다. 나만 해도 중요하고 큰 여러 문제들은 그냥 두고서라도 우선 장롱면허부터 진짜 면허로 바꿔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버킷리스트를 그저 마음속에 담아두지만 말고 일단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꼰대들의 단골 멘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적확한 말도 없다. 해봐야 안다. 생각만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작성할 버킷리스트는 실행 가능한 작은 것부터 내가 정말 원하는 궁극적인 무언가까지 담아내어야겠다. 


푸른 차밭, 커피 아닌 녹차와 함께 오늘도 행복한 책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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