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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 너머 Jun 23. 2024

제주의 새들은 제주어로 울까?

#시옷책방 #제주어 마음사전 #제주어

제주어 능력시험: 아래에서 어떤 뜻인지 아는 것이 몇 개인가요?

*아래아(ㆍ)를 비롯한 일부 글자들의 표기가 되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아래 제주어는 <제주어 마음사전> 목차를 따랐습니다. 능력시험 결과는 제맘대로…)

가매기, 간세둥이, 강셍이, 고장, 곤밥, 곰세기, 곱을락, 구젱기, 귓것, 굴룬각시, ?당, 깅이, ㄱㆍ대, 내창, 넉둥베기, ?끼리다, 달ㅁㆍ루, 도댓불, 돌킹이, 동카름, 두리다, ㄸㆍ르다, 랑마랑, 막은창, 모살, 몰멩지다, 물보라, 물웨, 버렝이, 베지근ㅎㆍ다, 보그락이, 본치, 부에, 벤줄, 생이, 성, 솔라니, 숙대낭, 숨비소리, 아ㄲㆍ다, 아시아시날, 얼다, 엥그리다, 오몽ㅎㆍ다, 오소록ㅎㆍ다, 요자기, 우치다, 웨삼춘, 이루후제, 조케, 창도름, 촐람생이, 카다, ㅋㆍ찡ㅎㆍ다, 타글락타글락, 퉤끼, 폭낭, 할락산, 할망바당, 허운데기, ㅎㆍ끌락

50개 이상: 오우! 당신은 혹시 제주 사람?

30개 이상: 아쉽군요.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하면 제주어 마스터가 될 수 있어요!

10개 이상: 거의 찍은 것 같은 의심이 들지만, 제주어 초보단계로 인정해 드리겠어요.

10개 미만: 유네스코 소멸위기 언어인 제주어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제주어를 한 움큼 배워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제주어를 한 움큼 배워왔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맞혀 보라는데 도통 무슨 단어인지 알아들을 재간이 없다. 말라붙은 상상력과 나름의 언어능력으로 추정해보려 해도 쉽지 않다. 아, 뭔가 자존심에 상처가 생긴다.

내가 누구인데! 부산에서 태어나, 충청도가 고향이지만 젊은 시절 전라도와 인천에서 잠깐씩 머무셨던 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 나의 20년은 이중사투리 환경에서 보냈다: 집에서는 얼핏 들으면 표준어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충청도의 단어와 억양이 묻어있는 말을 쓰다가, 집 밖에만 나가면 강력한 경상도 사투리를 듣고 구사해야 했다. 강원도에서 6년을 보낼 때는 나의 억양을 숨기기 어려운 몇 가지 단어만 들키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서울 사람인 줄 알았다. 진짜 서울에 가서 보니 진짜 서울말은 없지 않나 싶었다. 다들 표준어 같지만 사투리 같은, 사투리 같지만 표준어인 그런 말들을 쓰더라. 아, 이렇게 펼쳐놓고 보니 내가 나름 전국 사투리를 아우르는 '전국적' 인간 아닌가! 그런 내가 제주어에 한해서는 일자무식이다. 온 지 몇 달 안 되었으니 배우면 되지 뭐!

하지만 혼저옵서예밖에 모르는 엄마의 무식이 아이들은 재미있나 보다. 엄마도 모르네, 자기들끼리 실실 웃으며 문제를 낸다. 아이들의 정답이 진짜 정답인지 긴가민가해서 찾아보다 보니 유튜버 "머랭하맨"까지 구독하게 되었다. 이젠 새로운 영상이 업로드되면 아이들이 빨리 보자고 난리다.


언어는 사회를, 문화를, 그리고 그 사람의 사상과 생각을, 그 사람 자체를 대변한다고 믿는다. 실제 경험해보지 못했을 때 알기 어려운 행간의 의미들이 있다. 그 언어를 구사하고, 그 언어들로 겪어내게 되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영역. 그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그래서 책을 읽으며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겪거나, 여행을 하며 내가 살아보지 못한 공간에 뚝 떨어져 보면 문득문득 그 시대의, 그곳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히고 만다. 물론 책을 덮거나 인천 공항에 도착하고 나면 그 열망이 푸시식 사그라들곤 하지만... 어쨌든 욕망이든 열망이든 잠시라도 '바람(望)'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여전히 완전히 나이 들지는 않았구나 자조하게 되는 지점 중 하나다.


Language is a carrier of human heritage (in identity, historical, cultural and linguistic material);
Language is a local knowledge repository system (in identity and ethnic issues, traditional knowledge, biodiversity);
Language is a system for communicating between people (including in the political, sociocultural and economic domains);
Language is a regional, national and global economic-political resource to be managed as an asset along with natural, human, financial and other resources, as part of good governance and societal development. (유네스코: The World Atlas of Languages 중에서)


그나저나 제주사투리가 아니고, 제주어라고? 이 낯선 말이 방언, 사투리(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가 아니라 무려 하나의 '언어'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니! 이것 또한 모르던 사실이다. 찾아보니 학술계에서는 제주어를 한국어족에 속한 표준어와 다른 언어로 보고 있다. 이 제주어를 유네스코는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10,000명 이하만이 사용하는 언어로 설명하며 2010년 '아주 심각하게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지정했다(UNESCO Project: 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 2011). 이것은 유네스코의 사라지는 언어 5단계 중 뒤에서 두 번째에 해당한다. 제주어를 '가장 어린 사용자가 조부모이거나 그보다 더 나이 든 인구이며, 부분적으로, 그리고 드물게 사용하는(the youngest speakers are grandparents and older, and they speak the language partially and infrequently) 언어로 판정한 것이다. 가장 마지막 단계는 사라진 언어(Extinct language)다.


위키피디아: 아시아의 소멸위기 언어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endangered_languages_in_Asia


나는 (생긴 것과 다르게) 촌스럽고 고리타분해서 소멸 위기에 놓인 우리 것들이 못내 안타깝고 아쉽다. 사라지는 우리 것들을 논문이든 글이든 남겨두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그런 것은 유수 저널에서 잘 다뤄주지 않는다.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맞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사라지는(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도, 더 좋은 것이 새로 나와 그 자리를 차지할만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그림자의 끝이라도 밟고 징징대고 싶다. 참 이상한 성격이다.

아마도 새로운 것이 사실은 새롭지 않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서 내 아들들이 나왔듯, 씨앗에서 저 풀잎이 나고 꽃이 자라듯, 하다못해 많은 이야기들의 원형인 설문대할망 전설에도 어쩌면 여러 원형들이 덤겨 있을 것이다. 그 원형을 연구하고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는 있어야 한다.


제주어가 그래서 궁금해졌다.


제주어 마음사전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제주어에 대한 책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었다. 학술적으로 어원을 파고들만큼의 여유는 없고, 그럼에도 제주어의 맛은 봐야겠어서 선택한 책이 바로 <제주어 마음사전>이다(제일 처음 읽은 책은 <응답하라 제주할망>이었는데 이 책은 다음에 소개하겠다).


이 책은 읽은 지는 꽤 되었다. 책을 고를 땐 몰랐는데 읽다 보니 이 책의 저자는 제주 태생의 시인이셨고, 언젠가 가봐야지 저장해 두었던 책방, 시옷서점의 주인장이셨다. 시옷서점은 현재 화, 수, 목 오후 몇 시간만 여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러다 보니 제주시로 넘어갈 때 슬쩍 들리는 것에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시옷서점까지 들렀다 글을 쓰려고 미루고 미루다가 글 쓰는 일이 기약 없이 미뤄질 것 같아 그냥 이렇게 쓴다.


나는 제주도 부루기에서 태어났습니다. 감귤밭에 딸린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할머니가 말하는 제주어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제주어는 내 마음속에서 감귤처럼 노랗게 익어갔습니다.
학교가 끝나 집에 가면 엄마는 제주어로 내게 소도리를 했습니다. 엄마는 마치 만담가처럼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줬습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도 엄마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제주어는 내 마음에 들어와 집을 지었습니다. 나는 그 집에서 시를 써왔습니다.


지은이의 말에서 저자(현택훈 시인)는 이렇게 스스로를 소개한다. 말이, 언어가 그저 의사소통만을 위한 것이 아니려면 저자의 말처럼 마음속에서 '익어야' 하는 것 같다. 제주어가 소멸 위기에 놓인 것은 어쩌면 제주인들의 할머니 이래로 더 이상 이 익어가는 과정이 없어졌기 때문은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저자는 감귤처럼 익은 제주어로 시도 쓰고 글도 지어 이렇게 제주어로 제주가 담기게 표현할 수 있었나 보다.


이 책엔 눈으로 그냥 읽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보면 더 구슬 같은 말들이 많이 담겨있다. 기억해 두었다 감성 충만한 날 끄적여보고 싶은 그런 형용사, 의성어, 의태어들이 가득하다. 순한글 우리말 중에 예쁜 말들이 참 많은데 제주어는 엑기스중 엑기스, 보물상자 같다.


p140 추억은 '오소록ㅎㆍㄴ' 시간 속으로 '오물락' 빠지는 일이다.
* 오소록ㅎㆍ다: 으슥하다. 구석지고 고요하다. '오시록ㅎㆍ다'라고도 한다.
p173 제주어 중에서 의성어나 의태어는 아주 감각적이다. 그 소리나 모습을 적절히 나타낸다. 타글락타글락(터덜터덜), 벨롱벨롱(불빛이 멀리서 번쩍이는 모양), ㄷㆍㄹ락ㄷㆍㄹ락(들먹들먹), 비비둥둥(악기 울리는 소리), 빙삭빙삭(방긋방긋 웃는 모양), ㅂㆍ들랑ㅂㆍ들랑(바동바동), 실트락실트락(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참아 가며 느리게 하는 모양), 이레착저레착(마음이나 행동을 하나로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상태), 주왁주왁(기웃기웃. 주먹을 연해서 내미는 모양), 화륵화륵(당황하여 이리저리 바삐 헤매는 모양. 부리나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양) 등. 언어가 감각적인 건 그 언어가 삶 가운데 살아 있는 언어라는 증거가 된다.


이 책을 한 번 읽었다 해서 이 제주어들을 적재적소에 기억해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은 언어를 배우고자 참고할만한 서적이 아니다. '사전'의 이름을 책 제목에 가져다 놓았지만 단어의 순서만 '가나다'일뿐 일반적인 사전이 지닌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지루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제주어 단어 하나하나가 저자의 경험과 생각을 입고 이야기가 된다.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사람의, 한 가족의 제주를 엿본다. 제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가 이 말속에 살아있다. 제주 4.3 때의 잃어버린 마을들을 곱을락 하다 숨은 아이들로 표현한 문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p27 해녀가 물질을 하다 돌고래를 만나면 "배 알로! 배 알로!"라고 외친다. '알로'는 '아래로'라는 뜻의 제주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돌고래가 해녀의 소리를 듣고 해녀보다 아래로 아주 낮게 잠수를 해 지나간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 있을까. 버스를 타고 제주도를 돌다가 제주 바람을 만나면 우리는 바람 아래로 자세를 낮춰야 한다. 무언가 부딪칠 것 같은데 자세를 '알로' 하면 의연하게 문제를 풀 수도 있다. 우리는 돌고래와 함께 제주도에 산다.
* 곰세기: 돌고래. '곰수기'라고도 한다.
p29 4.3때 잃어버린 마을들은 세월의 저편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완전히 '곱아'버린 그 마을들. 다랑쉬, 무등이왓, 곤을동, 어우늘, 이생이...... 아름다운 제주 마을 이름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는 비극이 웅크리고 있다. (중략) 다랑쉬, 무등이왓, 곤을동, 어우늘, 이생이...... 잃어버린 아이들 이름 같다. '곱을락'을 했는데 끝내 찾지 못한 아이들. 그 마을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곱을락: 숨바꼭질. 달리 '곱을레기', '곱음제기'라고도 한다.


책에 등장한 고넹이(고양이)도 곰세기(돌고래)도 제주어로 만나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5월에 다녀온 수망리는 물보라라는 제주어로 부르면 더 예쁘다. 얼마 전 갔던 책방이 오밀조밀 모여있던 종달리는 작가 말대로 이름도, 마을도 아ㄲㆍ다(귀엽다, 사랑스럽다, 소중하고 귀한 아름다움). 표선 해변 너머 캠핑장에 보그락이(포근하게 잘 부풀어 오른) 올라온 토끼풀도 다시 한번 눈길이 간다.


눈으로 한번 더 제주어를 담아보며, 입으로 더듬어 말해보며, 오늘도 아이들과 제주어를 하나씩 마음에 담아본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주어가 불리고 읽혀졌으면 좋겠다. 이런 책이 더 많이 출판되면 좋겠다.



[참고자료]


https://gistnews.co.kr/?p=3521


제주민속촌: 제주어 듣기 평가 1탄: https://www.youtube.com/watch?v=RPwnw0dWylM

제주민속촌: 제주어 듣기 평가 2탄 https://www.youtube.com/watch?v=d0cbxgv74BU


제주살이 능력고사 예상 문제집:

https://www.sosimbook.com/product/%EC%A0%9C%EC%A3%BC%EC%82%B4%EC%9D%B4-%EB%8A%A5%EB%A0%A5%EA%B3%A0%EC%82%AC-%EC%98%88%EC%83%81-%EB%AC%B8%EC%A0%9C%EC%A7%91/1178/category/53/display/1/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0158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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