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mbti 유형 검사나 사주팔자, 별자리 운세 같은 거에도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귀얇은 나이지만, 사랑에 대해서만은 언제나 굳건한 마음이 있었다.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거나, 자칭 사랑(혹은 연애) 전문가(?)라는 자아도취 같은 건 물론 아니고. 사랑이란 인간이 기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그 듬직함에 마음이 갔다. 사랑에 대해 믿고 있는 순간만은, 나 자신이 조금은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졌고, 사랑에 준해서 뭔가를 바라보고 생각할 때의 나는 꽤 괜찮은 선택들을 하곤 했다. 나에게 사랑은 최후의 보루나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라고 마음껏 기대고 응석부려왔다.
그런데 살면서 몇 번, 이런 저런 사랑에 실패하고, 그 실패의 원인이 결코 상대에게만 있지 않다는 걸 아프게 깨달은 다음부터 나는 사랑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부족한 내가 마음대로 사랑을 가져다 쓰고, 사랑을 말하고, 사랑에 기대고, 사랑을 핑계 삼는 일이 괴로워졌다. 사랑은 그게 아닌데, 사랑은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자꾸 사랑이라면서 사랑이 아닌 길을 가고, 사랑이라면서도 사랑하길 거부했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눌 때가 아니라 끝내 그 사랑이 결별을 맞은 후에야 나는, 내 사랑의 진짜 모습과 재회하는 꼴이었다. 미안하다고, 이렇게밖에 못해서 내가 미안하다고 한참을 서성였다.
서두르지 말자, 고 생각하면서 나는, 마치 사랑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심정으로 사랑이 뭘까, 어떤게 사랑일까,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고민하게 된다. 책에 밑줄을 긋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나는 내 마음에 묻는다. '사랑'에 대한 모습을 다시 그려간다. 내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바라보며 어떨 때 사랑이 우리를 감싸는지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림에 선을 더했다 지우고 색을 칠했다 덧입히면서 과연 이 그림이 어떤 모습이 될까 궁금해하는 것처럼.
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받는 자의 제대로 된 행동인지, 잘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지침들은 거의 없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결여와 반대에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결여 없이 시작되는 노력과 궁리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는 자는 사랑에 대하여 굳이 궁리하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73쪽)
"공룡은 이제 많이 그려서 너무너무 잘 그리니까 딴 것도 그려보자. 꽃도 좋고 물고기도 좋고, 다른 동물도 좋겠지."
조카는 눈썹을 찡그리고 아랫입술을 불룩하게 내밀며 대답했다.
"공룡은 만날 수가 없어서 그리는 거예요. 그리고 있으면 꼭 만나고 있는 것 같단 말예요." (109쪽)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곁에 두되, 다른 노선은 정녕 없는 걸까.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연료로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이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를 서로 보태기 위한 두 사람. 거대하고 획일화된 악습들의 연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관성을 멈추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두 사람. 시스템의 바깥에서 자기 자신의 내적 질서와 부합되는 새롭고 자그마한 시스템을 함께 모색하는 두 사람. 이인삼각처럼 헛둘헛둘 발을 맞추는 것에 사랑을 사용하면 좋겠다. 목표를 향해서 헛둘헛둘 뛰어가는 게 아니라, 목표를 지워버린 채로 출렁이는 불안의 요동에 리듬을 맞춰 그렇게 하면 좋겠다. (155쪽)
사랑은 아마도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한 두 마디 말로 정의할 수도, 몇 가지 행위로 표현할 수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은 어떤 한 마디 말이기도 하고 어떤 하나의 몸짓이기도 하다. 사랑은 전부이면서 때로는 아주 작은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것이 진정, 완전한 것이 아니고 무얼까.
나는 때로 내가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려)는 것이 사랑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인지 우려한 적이 있다. 결국 사랑을 의심하게 된건가 하고. 아니, 아니었다. 그건 사랑에게만 책임지우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 사랑이 뭔가를 해줄 것이라고 부담주지 않기로 한 나의 부지런함.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뭔가를 하겠다는 약속. 사랑에게 뭔가를 해주겠다는 마음. 사랑이라고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사랑 아닌 것들을 알아보는 눈이었다. 그렇게 나는 로맨스와는 다른 길로, 말랑하고 부드럽기만 한 것들과는 조금 멀어진 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을 그리며 산다. 사랑을 공부하며 산다. 사랑과 함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