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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30. 2021

호구들의 반란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저 제목에 끌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쓴 책 제목은 보이지도 않았다면, ㅎㄱ 조합만 보면 "응? 나?"하며 뜨끔한 심장을 부여잡는다면, 당신도 나처럼 호구력이 만렙인 만만이 당첨이다. 우리는 콩 한 쪽 가진 걸 기꺼워하며 나눠 먹지 못해 안달이고, 열 손가락 중에 한 손가락만 쉬어도 그 꼴을 못 보고 남의 짐을 그 손가락에 걸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매일 밤, 대체 나는 왜 이리 호구일까, 신세를 한탄하다가도 몇 년 만에 온 지인의 연락, "내일 바빠?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에 마치 전 애인의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잘하는 것은 자책이요, 전문용어로는 내 탓 되시겠고, 주종목은 해주고 생색도 못 내기, 후회하면서도 또 도와주기 되시겠다. 그런데 가끔 진짜 문제는, 그들이 얄밉다는 걸 다 알면서도 도와주고 싶어하는 이 마음이다. 저 사람한테 생색도 내고 좋은 말도 들을 기대보다는 도와주는 그 자체가 행복인 내 이 멍청한 심장같으니라구! 너는 마치 '남(의)편'처럼 '남(의)심(장)'인거냐!


우리가 완전히 착해서 되게 괜찮은 사람들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말하자. 상대가 원하는지 묻기도 전에 서둘러 친절하고, 내가 원해서 친절해놓고 상대가 내 맘 몰라준다고 서운해한 적 없나? 때로는 나만 친절하고 좋은 사람인양 착각한 적은? 나의 선의에 자신이 없어서 "그래 이래서 착하면 호구라고 하는거야"라며 스스로 먼저 포기해버린 적은 없나? 그럴 때 나에게 나의 다정함은 최선이 아니라 최악의 선택이었고 짐이었다. 나조차도 내 다정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우리들이여, 여기를 보시라. 여기 이 똑똑하고 다정한, 게다가 우리의 심장을 잘 알아봐주시는 분들께서 우리 호구들이 아주아주 똑똑한 사람들이고, 누구보다 진화가 더 많이 된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강해서가 아니라 다정한 방식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 이 설명을 들으면서 '저자도 어지간히 당하고 산 모양이군' 하며 저자 역시 우리와 동류일 거라고 짐작했나 안했나! 우리는 이제 우리와 같은 종류를 단번에 알아보게 되었다고, 또 좋아했나 안했나! 편가르기는 다정함의 적이거늘!






'인류애' 라는 말이 하도 거창해보여서 나는 내 삶에서 그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았다. 나에게는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가'의 의미 정도로 느껴졌다. 내가 잘 아는, 나와 친한 사람이 아닌, 처음 보는 이에게 건네는 친절이 받아들여졌을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내가 문을 잡아 주었을 때 살짝 웃으며 목례를 건네는 사람의 눈빛, 마트 계산대에서 적은 양의 물건을 계산하려는 사람에게 순서를 양보하자 정말 기다린 일이었다는 듯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올 때, 낯모르는 할머니의 물건을 지하철 출구까지 들어다 드리는 동안 몇 살이냐, 어디 사냐, 나는 아들네 집에 가는 길이라며 다정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를 기억한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맞다'는 강한 확신을 느낀다. 내가 대단하다거나 멋지다거나 훌륭하다는 느낌일수도 있겠지만 그것들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그럴 때 나는 '맞다.' 다정함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맞는 행동, 가장 의미 있는 행동, 가장 귀한 행동이다. 그래서 그 어느때보다 나 자신이 맞춤하게 느껴진다. 그건 만족스러운 기분이고 충족되는 경험이어서 굳이 대단하고 멋지고 훌륭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맞다.


다정한 건 좋음을 넘어 맞는 일이구나. 그래, 우리 모두 다정하게 살아가자! 아주 간단한 일이잖아. 그런데, 나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보고 싶다. 이해인 수녀님은 한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다. "수도자들을 떠올리면 '착할 것 같다'고 대부분 생각하시더라구요. 하지만 막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분별 없는 착함을 경계합니다. 분별 있는 지혜를 원합니다."


나는 이 사려깊고 다정한 책을 읽으며 "우리의 본성 안에 다정함과 잔인함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고, 우리를 다정하게 만들어주는 바로 그 능력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맹렬히 잔인해질 수 있다"는 부분에 방점을 찍는다. 우리가 다정함을 선택할 수 있듯 잔인함 역시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라면 매번 틀렸다고 느끼면서도 다정함을 선택할 사람이 누가 있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먼 미래의 결과를 위해서 지금 내 눈 앞의 손해(라고 느껴지는 상황)을 무릅쓸 수가 있을까?


다정함도 소진된다. 맘껏 꺼내 쓰기만 하고 되돌려주지 않으면. 다정함을 실컷 이용해놓고 고마워할 줄 모르면. 그것도 모자라 "네 다정함은 네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냐"고 은근히 모욕하면. 다정함은 고갈되고 말 것이다. 다정함은 무한동력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세상을 향해 다정함을 지켜달라고, 다정함은 나약한 게 아니라고 항변하는 일은 지친다. 우리는 무던히도 찔리고 베인다. 이용당한 다정함, 무시당한 친절, 내 부족함때문으로 곡해된 선의 앞에서 좌절해본 적이 있다면 알고 있을 것이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들은 자주 비웃는다. "누가 친절해달라고 했니?" 냉소는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타인을 향한 근거 없는 비방과 모욕으로 번지고, 그것이 혐오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아이러니한 일은 오해를 풀어야 하는 건 언제나 그 오해를 먼저 시작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오해를 받은 사람의 몫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관용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 . .) 가치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다정함은 쉽게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를 '우리'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다정함을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비관용적인 사람들 역시 그들이 가진 다정함을 최대치로 사용하며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 그 범위가 좁아질수록, 편견이 강화될수록 다정함은 소수에 국한되는 가치로 전락한다. 그 작은 범위에 들어오지 못한 타인들은 외부로 간주되고 그 외부에 대한 공격은 자주 '우리'를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오인된다.


그런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당신의 다정함이 틀렸다는 지적이 아니라(혹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교육의 방식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의 다정함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범위를 점차 넓혀나가면서,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배척하던 사람들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사회적으로는 냉소를 바탕으로 한 비방, 모욕, 혐오 표현 등이 (해서는 안되는)'문제'라고 인식되는 문화적 규범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정함을 위해 또 다시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제거하려고 든다면 그것 역시 폭력일테니까.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는 증오언설을 방지하는 법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타인 또는 타 집단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그들을 모욕하거나 협박하는 발언"은 위법이다. 2000년에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웹사이트가 법률을 위반했다는 판결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증오언설을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집단에 대한 혐오를 유발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2017년에 독일은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가 24시간 이내에 혐오표현을 삭제하지 않을 경우 5000만 유로 상당의 벌금을 부과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증오언설을 "종교적 감수성을 해치는 표현"으로 정의한다."


정작 중요한 건 다정함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다정함을 계속해서 선택할 수 있도록 그것을 더 소중한 가치로 만드는 일 아닐까. 나는 차라리 나의 다정함을 분별 없이 소진해버리는 게 아니라, 다정함을 필요한 곳에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게 다정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다정하고 싶도록 주변을 가꾸고 돌본다. 그럴 때 나는 예의 그 '맞다'는 느낌을 마주한다. 귀한 것을 귀하게 쓰고 귀하게 대접하는 것. 그래서 "착하면 호구된다"는 말에 코웃음 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다정함을 어렵고 깍듯하게 대하는 것. 나의 착함이 "선택"임을 잊지 않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을 함부로 대하는 이에게까지 무조건적인 헌신을 선물하지는 않는 것. 이해인 수녀님의 말씀처럼, 분별 없는 착함이 아닌, 분별 있는 지혜를 소망하는 것. 그것은 '맞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적자생존'이 틀렸다는 말에 대해. 이 책을 감수한 박한선은 말한다. "원문의 제목인 'the Friendliest'는 사실 '다정한 것'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근심 '우(憂)'자에 사람 '인(人)'을 합친 '우(優)' 라는 단어를 제안한다. '우(優)'의 사전적 의미는 '넉넉하며 도탑고 인정 많고 부드럽고 품위 있고 뛰어남'이다. 흥미롭게도 '우'는 걱정, 불안, 질병, 고통, 고생, 죽음 등의 뜻이다."


다정함이라는 말 안에는 어떤 것을 쓰러뜨리고 무너뜨리고 승리하고 우위에 선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차라리 그 반대의 모든 것들을 상징한다. 넉넉하고 부드럽게, 많은 것들을 걱정하고 돌아보며 보듬고 챙기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겠고, 계속 해나가야 하는 일이겠다. 수녀님의 말씀처럼, 분별 없이 착하다가는 오래 갈 수 없다. 다정함의 최대의 적은 한 번의 패배가 아니라, 다정함이 싫어지는 것, 더이상 나 이외의 타인을 껴안기 싫어지는 것, '인류애가 사라지는' 감정일테니까.


정세랑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여럿 나오지만, 특히 다음의 구절은 오래 잊히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을 어떻게 이기나. 이기지 못하는 그것까지도 착한 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항복한다. 그녀의 말이 전부 맞으니까. 도저히 그렇게까지 해서 당신을 이겨먹지는 못하겠는 내 마음은 이미 나도 모르게 영원한 패배를 약속해버린지도 모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든가, 져도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나에게 그건 완전한 진실이 아니니까. 다만 내가 왜 지는지는 알고 지고 싶다. 그럴 때 나는 질수는 있어도 실패하지는 않는다. 내가 당신을 애써 이기지 못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졌지만, 나는 성공했음을 기억한다. 나는 적어도 다시 누군가에게 손내밀 힘을 잃지는 않았음을, 기억한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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