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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Dec 17. 2020

나를 나이게 하는 일

김이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 마음이나 바뀌면 연락 줘요.  계속 그대로 있을 테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사람이 카페를 나섰다. 나는 차마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볼  없었다. (본문 )


심장이 덜컹 하고 내려앉는다. 그녀에게서 그마저 사라진다면, 그녀는 어쩌지. 그녀의 존재 이유인 '시'는 가족을 돌보느라 잃어버리기 직전이고, 그녀가 이토록 사랑하는 그마저 사라진다면, 이제는 당신을 기다리는 일에 지쳤다면서 연락을 받지 않거나, 어느날 문득 전화를 걸어와서 "그 반지는 가지든 버리든 마음대로 해요.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니."라고 이별을 통보하면 어쩌지. 나가서 그를 잡아, 보고싶었다고 말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해, 지금 그 집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말해.






사실 이런 '혼자 말하기' 증세는 그녀의 소설을 읽는 내내 계속됐다. 그녀가 동생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쁜 저녁 시간을 보낼 때, 그런 그녀를 보고도 못 본 채 하는 그녀의 엄마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 그녀가 자신의 가족들에 치여 끝내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때,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전화해서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라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마치 소설에서 못다 들은 이야기라도 있는 듯 내내 속으로 중얼중얼 거리다가 결국, 독립하겠다는 그녀에게 엄마가 막말을 하는 장면에 이르러 "아, 거, 참, 해도 너무 하네!"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더 보탤 것이 없는 글이 아니라 더 뺄 것이 없는 글'이란 그녀의 소설 같은 글을 말하나보다. 그녀의 글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런데도 어느 하나 부족한 데가 없다. 언제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건 읽고 있는 '나'의 몫이다. 분노하고, 눈물 흘리고, 화를 내고, 애틋하다. 그녀는 그 장면을 공들여 묘사하고는 어느새 다음 장면을 살피러 떠난다. 나는 홀로 남아 "응? 어디가? 뭐 더 할 말 없어?"라며 되려 응석을 부린다. 내내 이렇게 그녀가 묻고, 내가 답하고, 그녀가 보여주고, 내가 느끼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녀의 소설이라면, 이런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계속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아주 작은 대상도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은 없다. 금방 설거지를 마친 물이 흥건한 싱크대도, 아이들이 먹던 것을 잔뜩 엎지른 거실 테이블도 모두 제 역할을 해낸다. 그렇게 비로소 그녀의 머리 속에 존재하던 완전한 세계가 글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내가 발딛고 있는 이 현실의 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이란 이토록 빼곡하게, 우연까지도 빠짐없이 제 자리에 있어야만 완성되는 완전한 것이었나. 그것을 글로 묘사하는 일의 어려움을 들여다보자니, 결국 삶이 그만큼 섬세한 것은 아닌가, 혹은 섬세하게 들여다봐야만 그 의미를 다 알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지금 내 곁에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의 생활을 슬쩍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 때문일까. 어느새 그녀의 시선이 되어 나의 삶을 들여다 보게 된다. 나는 나를 나이게 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묻는다. 삶의 구차하고 번잡스러운 면면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타협하며 살아간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타협이라는 이름에는 삶이나 사랑, '나 자신' 같은 것들은 포함돼서는 안 된다는 걸. 그러니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저런 것들을 걸고 무언가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알면서도 때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끝내 저런 것들을 걸고 타협한다. 그리고 뒤늦게, 예정된 후회를 얻는다.


그녀는 말하고 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삶이라는 걸, 사랑이라는 걸, '나 자신'이라는 걸 되찾기 위해 애쓰는 내 모습을 똑똑히 보라고. 당신은 나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기를.


어느 작은 방에서 필사 노트를 펼쳐둔 채로 시를 적어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래요,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께요' 하고 그녀에게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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