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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l 22. 2021

당신이 싫어할 우연에 대하여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남편에게 일어났던 사고와 치료 과정을 오래 지켜보았다. 이제 그에게 질병과 장애는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에게 찾아온 불운을 살아내면서 내가 놓치지 않고 지키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아픈 건 그의 몸"이라는 생각이다. 아픈 건 그의 몸이고 장애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 역시 그의 몸과 마음이다. 내 몸과 마음은 절대로 그의 몸과 마음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의 고통을 완전히 알 수 없다.


일면 당연한 말로 들리지만  당연한 이치를 매일의 생활에 적용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우리는 모르는 상태보다는 아는 상태를 선호하고 때때로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한다. 타인의 몸과 마음을 '내가 모르는 영역'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나보다 불편하고 약해진 남편에 대해 나는 쉽게 '안다' 확신해버리게 된다. 행동이나 생각에 있어 건강할 때보다 제한적이  '상황' 두고 마치 내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쉽다. 나는 남편이 지금보다 의식이 훨씬  좋을 때도 남편을 아기 취급하거나 자기 의사가 없는 존재로 대하지 않았다. 피부로 둘러싸인 나와 타인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 서로의 몸이 되거나 서로의 마음이 되는 경험을   없다. 남편을 간호하며 가장 오래 느끼고 매번 겸손해진 부분은 바로 여기다. 남편과 내가 특히 고통에 있어서는 '완벽히 타인'이라는 .







또 수다가 길었다.


죽음을 앞둔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그녀의 투병을 함께 지켜본 인류학자 이소노 마호가 주고 받은 편지를 엮은 책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을 읽었다.


'말'을 도구로 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답게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담긴 정제되고 정직한, 또한 정중하고 사려깊은 사유가 빛났다. 편지 형식의 장점을 충분히 취해서 읽기에 어렵거나 무겁지 않으면서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인생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의 탄생과 소멸에 대해 쉬이 답할 수 없는 묵직한 질문을 품게 된다.


"저 역시 다음 달에 갑자기 무슨 일을 겪을지 모릅니다. 단순히 병을 진단받지 않았을 뿐, 알고 보면 제가 미야노 씨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을지도 모르지요. (. . .) 리스크란, 위험성이란 무엇일까요?"


"애초에 '선택'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합리적으로 비교하고 검토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우리는 정말로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선택하는 것이 정말로 '선택'한다는 것일까요? 결국 무언가에 떠밀리는 식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면, 선택을 능동적인 행위라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어떤 상태에 이르러 안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는 불행한 걸까요? 이소노 씨의 편지를 읽으면서 자문해보았습니다.

질문. "나는 불행한가?"

답. "불운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책의 제목처럼 질병은 우연히 발생한다. 우연에 대해 20년을 연구해 온 미야노 마키코는 우연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우연한 만남, 우연한 기회, 우연한 인연처럼 우리가 살면서 마주쳐도 굳이 피하거나 거부할 이유가 없는 종류의 사건들이다. 다른 하나는 질병, 사고, 범죄나 재해처럼 우리가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하는 모든 사건들이다.


우리는 두 가지 우연 중에서 특히 불운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일단 거부하기 때문에 불운을 살아내는 대신 왜 그런 우연이 발생했는지를 규명하려 든다. 이유가 설명되면 납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미 우연은 발생했고, 확률을 통해 가장 근접한 이유를 찾는다해도 그 우연을 살아가야 하는 앞으로의 시간에는 변화가 없다. 오히려 이유를 밝히는 동안 (혹은 그 이유를 밝혔다고 믿으면서) 그 우연을 '변화할 수 없는 것'으로 믿어버리게 된다. 그때부터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됨은 물론이다.


더 힘든 경우도 있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일이다. '내가 그 길을 지나지 않았다면' '내가 좀 더 건강하게 지냈다면' 때에 따라서는 앞으로의 삶을 위해 반성하고 고쳐야 하는 지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우연이 왜 내 인생에 나타났는지를 설명하는데 온 신경을 쏟을 뿐, 반성은 커녕 나를 향한 비난이나 공격에 그치고 만다.


이는 사회적/문화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 현대 사회에서 우연은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다고 선전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 의견에 반대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우리 손에 달린 일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인간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 아니냐고. 상황은 여전히 우연에 의해 일어나지만 인간의 반응, 사유, 선택을 통제하면서 마치 상황이 통제되고 있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 아니냐고.


그들은 질문한다. 내가 절대 원하지 않는 그 일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내 인생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우연으로 가득한, 아니 어쩌면 우연의 연속이고 집합일 뿐인 인간의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당위나 강요 없이, 최대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고민해보려는 것이다.




어릴 때 나는 '권선징악'의 구조를 따르는 동화가 좋았다. 권선징악 중에서도 '나쁜 사람은 꼭 벌을 받는다.'는 부분이 좋았다. 내가 착하게 살면 나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어린 마음을 다독이며 불합리를 견디고, 불공평을 참아냈다. 내 작은 세상에서 공포란 나쁜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흰 소복을 입은 귀신이 찾아오는 정도의 일이었으니까. 이기적으로 굴고 타인을 욕보이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났지만, 어린 마음에 새겨진 저 네 글자에 기대면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삶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슬프게도 저 네 글자의 원칙은 점차로 무너졌다. 내가 발딛은 공간이 넓어질수록 나쁜 놈이 벌받는 일도, 착한 놈이 상을 받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일어났던, 내 주변에 일어났던 여러 우연한 불운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은 일어난다.'는 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거 어딘가 고장나도 단단히 고장나버린 게 분명해. 착한 사람에게도 불운이 닥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착하게 살아야 하지?(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기를) 아니 그보다 먼저 나에게 닥친 불운을 어떻게 받아들이냔 말야. (반말 죄송) 그건 나쁜 사람이 벌을 받기를 바라던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천사 같은 아기들이 불치의 병에 걸리는 일, 어린이들이 하교 길에 납치되어 끔찍한 일을 겪는 일, 부모님의 수술비를 보이스피싱에 당해 한 순간에 날리는 일, 평생 나쁜 일이라고는 맘에 안드는 사람에 대해 꿍시렁 거린 게 다고, 화장실 앞에서 새치기 한 번 안한 우리 주변의 그 수많은 선량한 이들이 이유 없이 병에 걸려 죽는 일. . 이 수많은 '좋은 사람이 겪는 나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였다. 그야말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문제, 하늘이 노래지는 문제였다.


나는 아직도 때로는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을 느낀다. 그럴 때 나의 하늘은 노랗다. 나의 내면은 허약해서 아직도 좋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을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일은 있다'는 말을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면서 애써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실은 조마조마하다. 내 억울함이, 속좁음이 더 나쁜 일을 불러들일까봐. 나에게 일어난 불운한 일을 두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혹은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낙인찍힐까봐. 어디 나에게 일어나는 일 뿐일까. 누군가에게 일어난 불운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억울하지 않을까, 누가 그를 재수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찍지는 않을까 내가 더 전전긍긍한다. 그러는 동안 삶에 찾아오는 불운의 얼굴을 한 우연은 한쪽으로 미뤄진 채 제대로 경험되지 못하고 방치된다. 있는 힘껏 불운 그 자체를 살아내기에도 벅찬 순간에 헛일에 힘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별 수 없는 일이다. 불운이 가한 타격에 휘청거리는 사람에게 치명타는 어쩌면 불운 자체보다는 그 불운을 둘러싼 이중 삼중의 이기적인 시선일지 모른다.


삶은 우연으로 채워진다는 말은 그렇게 언제나 반쪽짜리였다. 그 우연 안에 우리가 싫어할 바로 그 일들이, 사건들이, 만남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거부한다면 내 삶은 늘 반쪽짜리일 테니까. 내가 그 우연들을 모두 받아안을 때, 끌어안을 때, 삶은 온전한 모양이 되고, 거기서 다시, 마치 미야노 마키코가 이소노 마호와 이 편지를 주고 받기로 마음 먹었을 때처럼, 다시, 삶은 시작된다. 불운이 찾아와서 나의 삶이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나의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삶의 시계가 정말로 멈출 때까지, 그 끝의 끝까지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우연의 시간'들을 통과하는 것이다. 미야노 마키코가 자신의 정체성을 단지 '환자'로 규정하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드리운 불운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았다. 불운조차도 여러 우연들 중 하나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녀 삶에 불운 말고도 아주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는 걸, 심지어 좋은 것들도 많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때의 삶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미리 결정적인 태도"를 용감하게 취하며, "현실의 발밑에 자리한 무(없음)는 간단히 뿌리치고, 존재를 향해 나아가며", "불운은 점이고, 불행은 선"임을 믿고 불운을 곧 불행이라 단정하지 않은 채로, 내 선택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매순간 실감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시간은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들의 시간에는 "두께"가 생겨나고, 그 두께를 느껴본 이는 결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를 알려준 두 사람의 우정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다시, 삶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완벽히 타인'인 나와 남편의 삶에 깃든 우연들 역시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덧. 여러 불운 중에서도 인재에 해당하는 일들은 더더욱 철저한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재가 아닌 온전한 불운만으로도 인간의 삶은 통째로 흔들린다. 인간이 인간을 스스로 공격하는 일들이 제발 줄어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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