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저지대>
김연수는 삼십대 중반에 발표한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큰 얘기에만 관심을 두던 20대가 지나고 나니 삶의 한쪽 귀퉁이에 남은 주름이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주름이나 흔적처럼 살아가다가 사라진다. 머리로는 그걸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니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는 구차한 짓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것은 큰 이야기든 작은 이야기든 상관이 없었는지 아이일때는 동화책을 10대에는 소설책을 좋아하던 나는 20대에는 큰 이야기에만 관심을 쏟았다. 변명을 좀 해보자면 사는 일은 너무나 고단하고 구슬퍼서 조금은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지치지 않고, 죽어서도 상처가 이어진다는 사실이 괴로워서 밀어냈는지도 모른다. 결국 돌아와야 할 이야기란 사람의 사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끈적하게 내 뇌리에 달라붙어서 그걸 떨쳐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큰 이야기를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만이 정당한 일이고 온전한 행동인 것처럼 나는 나에게 설득했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끝내 다시 사람에게로, 상처에게로, 슬픔에게로 돌아왔다.
그후로도 내 머리 속에는 늘 이 말이 따라다녔다. '사람이 사는 이야기는 결국 이 세계의 모든 것이다. 어떤 큰 이야기 속에서도 사람을 놓치면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하지만 큰 이야기 속에 낱낱의 사람을 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놀랍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작은 이야기면서도 아주 큰 이야기이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어이 일어서서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무너지고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동시에 미래인 이야기다. 나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결국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활자로만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고, 내면화했고, 나아가 그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엮었다. 그녀는 어디까지 바라보았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낡고 부서진 어떤 생각이 달라졌다.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들의 생을 따라가며, 나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우리 각자의, 수십 년의 삶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그 삶에서 뭔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던지고 누군가는 뭔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숨긴다. 어떤 선택은 슬프도록 처절했고 어떤 선택은 절박하고 괴로웠다. 그렇게 모두는 각자의 삶을 살며, 만나고 헤어진다. 서로에게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채로.
나는 이제 큰 이야기만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면 뭐든 듣고 싶다. 그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너무 가슴 아파서 외면했던 그 많은 슬픔들이 결국 삶이고, 그 슬픔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또 한 명분의 삶을 배운다. 내가 웃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음을 안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이 순간, 누군가는 처절하게 이별하고 있음을 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모두 떨어진 채로, 하나의 세계 위에 겹쳐져 있다. 그녀의 이야기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