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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Feb 25. 2021

나보다 더 큰 슬픔의 자리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슬픔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때는 슬픔에 대한 그 생각들이 곧 지나갈 거라고 여겼지만 틀렸다. 나는 여전히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오래 들여다본다.


이건 어디까지나 거리의 문제가 아닐까. 슬픔과 나 사이에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슬픔을 모른척 할 수도, 슬픔을 두고 멀리 갈 수도 있는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우리가 조금은 방관하거나 위로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거리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그 '슬픔'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우리는 아주 이기적이게도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신형철이 그의 책에서 말했듯이, 슬픔을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슬픔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하지만 슬픔과 내가 너무나 가깝거나 내가 곧 슬픔과 한몸일 때는 도저히 그 슬픔으로부터 달아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슬픔에 빠진다'는 표현을 쓴다. 슬픔은 너무 넓고 커서, 나 하나쯤은 그대로 풍덩 빠져서 몇 년이고 헤엄칠 수 있다. 놀랍게도 슬픔 속에는 기쁨도 사랑도, 영원도, 희망도 들어 있다. 슬픔처럼 느껴지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은 어느 순간 슬픔의 얼굴로 우리를 덮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나는 슬픔을 극복했어' '나는 더이상 슬프지 않아' '처음부터 별로 슬프지도 않았어' 그렇게 슬픔이 사라진 것처럼 슬픔이 없어진 것처럼 굴다가 어느 날 문득,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놀라거나,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 그러면서도 끝내 '슬프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슬픔이 무슨 전염병이라도 되는 것 같다.






작가는 여러 슬픔 중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대해 공부한다.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슬픔을 받아들이게 되는지,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우리는 왜 이토록 슬픔으로부터 달아나려고만 하는지, 그는 다양한 사례를 연구하고 그것을 무겁지 않은 재치 있는 문장으로 풀어낸다. 그런 문장들 덕분에 책은 슬픔에 대해 우리가 떠올리는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거리감은 마치 사람들이 슬픔에 대해 유지하고 싶어하는 딱 그 정도의 거리로 느껴진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손가락질 받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깊이 알게 되어 부담스럽지도 않은 그런.


그들은 이런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슬픔에 대해 자세하고 다정하게, 슬픔이 가진 어떤 면도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본다. 마치 "별 것 아니에요, 한 번 읽어보세요. 거봐요. 꽤 괜찮죠?"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들이 유지하고자 하는 거리는 사실 읽는 사람들을 위한 거였다는 느낌. 그들은 누구보다 슬픔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만, 굳이 그렇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 나는 그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알리고, 슬픔이 유해하지 않다는 걸 설명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 한다. 그들의 유쾌한 말투 뒤에 숨겨진 깊이 있는 통찰들을 보면 그런 생각은 확신이 된다.




아프거나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은 고통 때문에 당연히 집단의 정서적 역동을 감지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빠지면 모든 정서적 동요에 전에 없이 민감해진다.


때때로 집단은 당신과 일심동체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냥 혼자 떨어져 있고 싶다. 혼자 있고 싶은 욕구는 애도의 한 부분이다. 무례하거나 고마움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슬픔은 시작이다.


가장 힘들고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당신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것에 정직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당신과 당신이 잃어버린 사람, 지난날 그와 함께한 일과 그가 없기에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말한다. 슬픔은 날것의 진실로부터 맹공격을 받는 일이기에 진실 자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바꾸지 않고서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이는 슬픔으로 인해 더 정직해지고, 어떤 이는 덜 정직해진다.


이런 경험은 수치심을 느낄 것이 아니라 훈장을 받아 마땅한 감동적인 용기다. 당신은 그 용기의 증거가 되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불쾌한 광경을 외면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이의 무너지는 기품을 떠받쳐주었다.


우리는 자기애와 위선에 물든 타인의 감정에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어떤 죽음을 둘러싸고든 항상 그 상황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는 사람이, 여럿이 함께 경험하는 신성한 슬픔을 개인적인 목적에 이용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슬픔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을 때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다시 유머를 즐기게 되리라는 것, 삶은 계속 되리라는 것, 시계는 다시 똑딱똑딱 가고 별들이 다시 보고 싶어지리라는 것을. 그리고 숨 막히게 하는 슬픔의 미덕과 대결을 벌이는 중에도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슬픔을 겪는 동안 배운 것들로 인해 자신의 행동을 바꾸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고칠 필요가 있는 사소한 성격적 결함이나 재평가해야 할 삶의 우선순위 같은 영혼의 할 일 목록을 만들지 않고는 병이나 슬픔이라는 호된 시련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그들이 건네준 위안을 다시 읽는다. 내 생각이 틀렸다. 그들은 슬픔과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 모든 것들이 슬픔의 얼굴이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말한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이, 죽기에,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이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슬픔을 극복하거나 슬픔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다. 슬픔에는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우리는 슬픔을 통해 나아간다. 슬픔과 함께 살아간다. 우리가 전처럼 웃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게 돼도 괜찮다. 슬픔을 극복했다, 슬픔에서 벗어났다, 슬픔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 실제로 그런 상태를 성취하지(혹은 원하지) 않아도 문제 없다. "슬픔은 시작"이고,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저 다시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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