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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Feb 11. 2021

함께 사는 일에 대하여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



왜 그런지 모르겠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뭔가 부조리한 일들을 맞닥뜨리거나, 기이할 정도로 이기적인 말이나 행동을 겪다 보면 그 일에 맞서거나 그 일을 해결하려는 것 말고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일이 있다. 그건 아주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갖는 일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 평소에는 쓸모 없다고 여기던 것들, 쉽게 지나치는 말이나 표정, 걸어가는 방식, 숨쉬는 순간 순간들.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인간이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걸어 왔길래, 이토록 많은 슬픔이, 이토록 많은 불합리와 부조리가 존재하게 된 걸까. 생각하다 보면 역시나, 나의 숨소리에, 나의 말소리에 더 귀기울이게 된다. 내가 먹는 음식에, 내가 발딛은 땅에, 내가 버린 쓰레기들에 자꾸 눈을 돌리게 된다. 아마도 내 눈에 띄지 않는 뭔가를 놓쳤음을 내 영혼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걸 찾으면 저런 일도 조금씩 줄어들거야. 그런 마음인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럴 때, 정혜윤의 책을 읽는다. 그녀는 덮어놓고 괜찮다고 말하는 법이 없고, 그렇다고 우린 망했다고 주저앉히는 법도 없다. 굉장히 이상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말할 줄 아는 사람. 그 이상과 교훈을 죽어있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로 표현해내는 사람.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아서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아름다운 것들을 꿈꾸게 만드는 사람.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드는 사람. 그래놓고 빙긋 웃으며 잘했다고, 그렇게 하는 거라고 등 두드려주는 사람. 그리고, 아주 결정적으로, '사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사람. 온갖 대단한 이야기에 기가 눌릴 법도 한데, 막상 그 엄청난 이야기들을 모두 읽고 난 후에는 점퍼를 챙겨 입고 가장 편한 운동화를 신고 당장 어디든 좀 달려봐야 할 것처럼 내 안에 억눌려 있던 에너지를 발견하게 해주는 사람. 정혜윤은 내게 그런 사람이다.



 





아주 많은 학자들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다그치고 혼내는 사람도 있고, 차근차근 분석해서 설명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이럴 거라고 말했지 않느냐며 생색내기 바쁜 사람도 있다. 그녀는 어느 쪽도 아니다. 그녀는 사랑에 대해 말한다. 마스크를 써야 하고, 허그는 금지, 사람 사이의 모임도 금지된 이 세계에서 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까이 다가 앉는 사랑, 서로 안아주는 사랑, 숨결에 실린 사랑, 죽음을 지켜봐주는 사랑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사는 첨단 자본주의 시대는 첨단 유행의 시대이기도 해서 시대적 분위기가 '영원히' 가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볼 때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삶의 좋음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선택은 우리 시대와 역행하는 것이다. 사실 남의 이목이나 조회수가 아니라 우주와 영원함을 신경쓴다니 얼마나 우습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딱 좋은 말인가! 하지만 이런 광활한 마음은 낯설고 별처럼 너무 멀리 있고 매우 사랑스럽다. (본문 중)


우리는 지금 이 시절을 '끝내기' 위해 어떤 '분절'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말 그대로의 '유행'병이 사라지는 시절을 기다리며 마치 지금을 (없는)시간으로 만들어도 괜찮다고 여기기 일보직전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모든 것은 분절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진다. 자연의 속성이 그렇다. 더구나 이 전염병은 종식을 선언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피부로 안전을 체감하기 전까지는 계속되는 공포다. 이런 류의 위기는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깔끔한 반전도, 명확한 구분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 모두가 기다리는 '펜데믹 종료'의 선언은 인류에게 공평한 환희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유행병의 시대가 끝난다는 건 한 시절의 분절이 아니라 이 시절 동안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고 바뀌었느냐의 이야기가 될 확률이 크다. 그러니 '지금'이 없이 '그 언젠가'는 영원히 없다. 그걸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렵다. 뾰족한 해결책이 아니라 모두의 작은 실천을 통해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 서서히 변화해가는 일 따위는 잊혀진 듯 보인다. 그건 좀 멋이 없는 일로 여겨져왔다. 스펙터클도, 스포트라이트도 없는 밍숭맹숭함은 유행에 뒤쳐진다고 평가받았다.


그 이유를 작가는 '영원성'에 대한 에피소드로 말한다. 내가 해 온 선택들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져서 지금 이 상황 앞에 놓여 있다는 걸 잊는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유행이 지나고 또 다른 유행만을 기다리거나 좇는다면 내 삶은 계속해서 분절될 뿐이다. 지금 이 상황이 그 분절된 사고와 삶의 방식이 보여주는 결과다. 내 삶과 내 삶을 이루는 많은 것들을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만, 다시 말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고 생각할 때만 이뤄지는 변화가 있다. 그러니 새해 첫 날의 반짝이는 다짐도 좋지만, 그 다짐보다 중요한 건 내 삶이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다시 내일로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 즉 영원성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어떤 선택들을 하는지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니, 바라봐야만 하는 것이다. 진짜 변화는 거기서 시작된다.


그렇게 변화된 관점으로 삶을 대할 때,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아주)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작가는 열 개의 이야기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자연과 우주,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 대해 말한다. 유한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생명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런 인간의 '입맛'을 위해 파괴되는 수많은 동물의 '삶과 영혼'에 대해, 그런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로 모든 걸 잃은 동물들이 선택한 일들에 대해, 생태계가 붕괴된 원인으로 (사실 그 모든 원인은 인간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동물만을 탓하는 인간의 파렴치함에 대해, 인간-자연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주고 받는 (하지만 주고받지 않아야 마땅한) 상처에 대해, 너무나 인간중심적이기만 한 이 문명에 대해, 그녀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나를, 나의 생명을, 내 주변의 생명을, 공기를, 지구를, 우주를 떠올리게 된다. 뭐라도 해야해, 내 안에서 외침이 들린다. 아주 작은 거라도 괜찮아, 뭐라도 해야해. 나는 일어선다.


일어서는 내 등에 대고 그녀가 속삭인다.


"최근에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일상적인 식습관이나 소비습관 등을 바꾸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과거에 하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 눈에 그들은 주의력과 절제야말로 우리 삶의 아름다움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 올 시대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만든 삶의 원칙을 지키는 것에 해방의 가능성이 있고, 그것이 일상에 활기와 아름다움과 품위를 부여하고 심지어 새로운 의미까지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많이 이야기되었으면 한다. 삶의 해방은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삶의 해방은 내가 하기로 한 일을 해내면서 온다." (본문 중)


생수를 사서 마시는 일을 그만두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버려지는 식재료가 없도록 식단 관리를 더 예민하게 한다. 가까운 거리는 (당연히) 걷는다. 장바구니를 언제나 가지고 다닌다. 쓸데 없는 소비를 줄인다. 분리 수거를 철저히 한다. 남과 비교하는 일을 그만 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차근차근 해나간다. (인간-인간 사이의 가장 큰 공해인, 쓸데 없는)말을 아낀다. (필요한) 행동을 한다. 사랑하려고 마음 먹지 않고, 그냥 사랑한다.


우리는 이미 늦었지만 작은 변화라도 시작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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