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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n 30. 2022

언니들은 계속 쓰고 있다.

그런 날이 있다. 사무치게 외로운 날. 이게 다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고, 내가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건가 싶고, 나는 나아지고 있는 건가 싶은 그런 날. 누구한테 물을 수도 없고 뾰족한 답이 있을 수도 없는 질문들이 내 마음에 가득해지는 날. 한숨이 푹푹 나오는 날. 자기혐오의 수치가 '매우 나쁨' 수준으로 치솟는 날. 물론 평소에도 하는 질문들이지만, 그런 날에는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러 갈 수조차 없게 저 질문들이 내 발목을 세게 잡는다.


그런 날이 찾아오면 나는 우선 몸을 움직인다. 주로 걷거나 집안일을 한다.  생각들이 크게 소용없 소모적임을 알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생각만 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차라리 공상이  가치 있다는 . 현실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어떤 부정적인 생각들은 자체적인 힘이 있어서 스스로 덩치를 불릴  안다. 생각의 덩치가 커질수록 내가  생각을 이길 힘은 적어진다. 마음의 작동 방식.


이건 꼭 시소 타기 같다. 마음은 언제나 양극단으로 치닫기 좋아한다. 허무함과 공허함의 끝에 다다르거나 "온 세상은 아름다워!"라며 눈을 과하게 반짝반짝 빛내는 식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24시간 내내 지속될 수는 없다. 나는 결국 저 둘 사이 어디쯤에서 나를 너무 자극하지도 나를 너무 넘어뜨리지도 않는 적당한 온도를 찾는다. 그래서 내가 나를, 세상을 허무로도 공허로도, 무조건적인 찬양과 기쁨만으로도 보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럴 때의 내가 가장 편안하기 때문이다.


기울어지려던 추를 되잡아 적당한 위치에 두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말끔하게 가벼워지진 않았어도 뭔가를 시도해볼 수 있을 만큼은 회복된 나를 발견한다. 기특하다. 오늘도 해냈구나.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넨다. 하지만 책상 앞까지는 어찌어찌 데려왔는데, 뭔가를 시도해볼 정도는 아니라면? 아직은 떼쓰고 싶어서 부릉부릉 다시 시동을 걸 준비를 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약을 좀 먹어야 해.


언니들의 책은 약이다. 쓰린 속을 달래주기도 하고, 답답한 속을 뚫어주기도 하고, 먹먹한 속을 문질러주기도 한다. 분명 약이다. 언니들이 앞서 걸으며 "나도 계속 쓰고 있어."라고 담담히 건네는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 용기가 솟는다. 언니들이 외계인도 아니고 같은 인간인데! 까짓거, 나라고 다시 시작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언니, 고마워! 책을 덮고 비로소 자판을 두드린다. 뭐라도 시도한다.




김소연, <어금니 깨물기>, 마음산책


그녀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은 이를 악물고 가장 열심히 산 시간이라는 것을, 여기 모인 글들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언니다. 나는 새로 나온 언니 책의 첫 장에 적힌 저 문장을 읽고 며칠 동안 힘을 냈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이를 악물고 살던 시간들을. 어쩌면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그랬다. '그러다 어쩌려고 그래?' 정확한 명칭도 명확한 코칭도 없는 대명사뿐인 문장들은 말하는 당신도 듣는 나도 더 답답하게 했다. 그러다 어쩌려고 그러냐니. 외계어인가. 사실은 본인들도 잘 모르겠는 거겠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만 꼭 언니처럼, 내가 어떤 시간을 버티며 건너고 있는지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주로 말하지 않고 바라봤다. 재촉하지 않고 자기 옆에 잠깐 앉으라고 의자를 두드렸다. 어떤 언니는 나만 보면 울었다. 정성이 갸륵하면 시멘트 바닥에서도 꽃이 핀다, 꽃이 핀다. 언니는 주문처럼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 말이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언니도 언젠가 시멘트 바닥에서 꽃을 피워본 적이 있을거라고, 언젠가 내가 악문 이를 풀게 되면 꼭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아기들은 오직 오늘만을 살고 내일은 없다고 여긴다고, 어딘가에서 들었다. 또, 아기들은 잠드는 걸 죽음과 비슷한 공포로 여긴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잠들려 하지 않는다고. 내일을 위해서 이젠 자야지, 하고 생각하면 아기가 아니라고. 그런 아이들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을, 내일이 곧 오늘처럼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을 가장 평화로운 방식으로 설득하는 일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일이라 했다. 자장가 속에 담긴 야릇하고 평온한 약속에 기대어 아이들은 애써 붙잡고 있던 오늘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스르르 잠이 든다. 약속에 기대는 한, 아이에게 기도가 필요 없다. 그렇게 기도가 무용해지도록, 기도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일. 그게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도가 무용해지도록, 기도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일 - 시. 맞아, 언니는 시를 쓰는 사람이었지. 언니의 글 앞에서는 다시 뭔가를 더 바라지 않게 되는 게 그래서였나. 뭔가를 빌지조차 않게 되는, 기도조차 잠든 고요함. 가장 간절한 것 앞에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평화. "하루를 살아도/온 세상이 평화롭게" "인내심이 자애로움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던 언니가 좋다.





대니 샤피로,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마티


솔직히 말해서 글 쓰는 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다양한 능력이 있나. 글이 아니고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법은 얼마나 많은가. 내가 과외했던 학생 중 한 명이 떠오른다. 그 아이는 '청소'를 좋아했다. 어디든 자기 손이 닿아 깨끗해지는 게 좋다고 했다. 학교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이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일과가 모두 끝나고 청소 시간이 되면 신이 난다고 했다. 어떤 날은 유리창을 닦고, 어떤 날은 분리 수거를 하고, 어떤 날은 걸레질을 하게 되는데, 자기가 지나간 자리가 말끔해지면 가슴 벅찬 뿌듯함이 든다고.


청소를 생각하는 아이의 얼굴이 하도 해맑아서, 하마터면 그래, 네 길은 청소구나! 두 팔 걷어 밀어주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내 마음이 들킨 건지, 스승보다 나은 제자였던 건지, 고등학생이던 아이는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우리 엄마 기절해요."했으니까. 나는 과외를 마칠 때까지 비밀을 지켰다. 우리는 때때로 청소처럼 정직한 뿌듯함을 줄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을까, 함께 고민하며 쉬는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말했다. 청소는 내가 움직이는 대로 결과를 낼 수 있는 일 같다고. 걸레질을 하면, 깨끗해진다고. 빗자루로 쓸면, 쓰레기가 없어진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래, 참 좋다. 그런 일이 또 뭐가 있을까?


아이는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적성에 잘 맞지 않는 공부를 12년째 하며 어른이 되는 날이 코앞에 다가온 아이에게, 정직하게 성과를 낼 수 있는, 노력과 성취를 따로 떼어 놓지 않아도 되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아이에게, 일단 네가 노력하면 이 사회와 공동체가 너를 좀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줄 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게, 나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했다. 청소처럼 노력의 대가가 바로바로 주어지지 않더라도 어떤 일들은 오래 노력하고 공들여야 결과가 나타나는 거라고 나는 아이에게 말했지만, 정말 그럴까? 왠지 나는 아이에게 또 내 진심을 들켰을 것만 같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연락이 끊긴 아이가 지금은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나는 드문드문 궁금하다. 어느 날 '청소 전문가'가 되어 티브이에 출연하는 건 아닐까, 혼자 상상하며 웃는다. 아이가 무슨 일을 하든 어딘가를 반짝반짝하게 빛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한편으론 아이가 세상에 너무 큰 실망을 할까봐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다른 방법이 없다. 세상이 더 나은 곳 - 노력하는 이에게 정당한 보상과 대가가 주어지는 곳 - 으로 나아가도록 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테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글쓰기로 말하자면, 투자 대비 효용이 지극히 낮은, 아마 청소 전문가가 본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 암흑의 영역이다. 해도해도 정리가 되지 않는 혼돈의 서랍 같은 거랄까. 여러 가지 재미 없는 어른의 일들 중에서도 극강의 비효율을 자랑하는 이 일을, 굳이 꼭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나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니 계속 쓰겠다고 생각하는 날은 마치 내가 나를 배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알겠고, 그러니까 왜 하필.


"심장이 냉정해서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다. 몰두는 필멸, 우울, 수치, 불운, 무기력을 불러일으키는 슬픔에 대한 대비책이다. 마법의 약은 아니지만, 냉혹한 진실이라 할 수 있다. 도널드 홀은 암을 진단받고 이렇게 쓴다. "작업은 죽음을 해독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거부도 아니다. 죽음은 작업하게 하는 강력한 자극제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오직 그뿐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면 좋겠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러면 남은 하루는 횡재나 마찬가지다."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날이 올 때까지, 쓸 수 있는 한 계속 쓰겠다고, 오늘도 나는 나를 배반하며.





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창비


나에게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 언니들이 있다.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리베카 솔닛, 주디스 버틀러. 언니들은 '남자들의 세계'라고 일컬어지던 영역에서 자신만의 분명한 목소리를 내며 더이상 '(어느 성별이 독점한) 누군가의 세계'라는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언니들의 이름이 더 높은 곳에 자리할수록 어쩐지 나에게는 점점 멀게만 느껴졌다. 그 언니들은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나 에밀리 디킨슨이나 도리스 레싱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솔닛 언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가깝게 느껴진 언니는 단연 솔닛이었다. 언니의 글에서는 드문드문 언니가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는, 그러면서 비슷한 걸 공유하고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언니의 방대한 독서량과 그에 따른 촘촘한 인용, 심오하고 깊이 있는 논리와 해박한 문장들은 언제나 반쯤만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달라졌다. 리베카 솔닛은 그녀의 최신작인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에서 그녀가 '여전히' 쓰고 있으며, 비로소 '자기 자신과 더 가까워'졌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워낙 많은 일이 있었고 워낙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때 그 깡마르고 불안정했던 젊은 여성은 나라기보다는 내가 한때 친했던 사람, 좀더 챙겨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은 사람, 요즘 만나는 그 또래 여성들에게 그런 것처럼 자꾸 마음이 쓰이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오래전 그는 정확히 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여러 결정적인 측면에서 그는 나와 달랐다. 그래도 그는 나였다. 세상에 서툰 부적응자, 몽상가, 쉴 새 없이 떠도는 방랑자였다."


그녀의 고백은 이어진다. "발언은 간접적이고 참조적일수록 좋다는 듯이, 내가 직접 진실히 느낀 반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였다. 영리함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몰인정한 태도는 상대뿐 아니라 말하는 나 자신의 가능성도 해친다는 사실, 진심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더 똑똑해지는 것, 더 명확해지는 것이 '정상'이라고 느끼도록 만드는 세상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거꾸로 걷기로 결심한다. 안다고 믿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의문을 가지는 것, 차라리 덜 똑똑해지는 것, 명확한 것은 많지 않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고. 나는 그녀만큼 많이 안 적도, 똑똑한 적도, 명확한 적도 없지만, 그녀가 돌아서서 걷는 그 길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능히, 그리고 기꺼이 걸어볼 만한 길이라고 느껴져서 힘이 되었다. 그녀는 한 번도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섣부른 설득을 한 적이 없지만, 나는 어쩐지 그녀의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도 할 수 있다'고 여러번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심드렁하고 기운 빠지는 날은 있다. 그게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가끔 이유 없이도 좌절하고 넘어진다. 서글프고 외롭다. 어쩌면 그건 인간 존재의 치명적인 결함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 세상에 주어진 유일한 브레이크 이거나.


멈춘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가. 멎는다는 것, 다한다는 것, 그만둔다는 것은 얼마만 한 힘이고 용기이고 결단인가. 그게 뭐든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지만, 실제로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반대다. 멈출 수 있기에 그만할 수 있기에 멎을 것이기에 끝이 있기에 모든 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요즘 자주 이렇게 생각한다. '지나치게 괜찮으려고 하지 않으면 어떨까. 좀 덜 괜찮아도 괜찮잖아. 가끔은 전혀 괜찮지 않아도 괜찮고.' 말장난 같지만 그러고 나면 실제로 조금은 괜찮아지는 나. 내가 문득 넘어지는 것은, 외롭고 고독해지는 것은, 더 나아가지 못하겠다고 느끼는 것은, 그저 지금 잠시 멈춰보라는 말일 뿐이라고. 다른 뜻은 없다고. 그리고 그렇게 멈춘 우리는 지금 좀 더 아름다워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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