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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nar G Apr 02. 2024

사랑할 수 있어 다행이야

 늘 나보다 그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매 순간 아팠다. 아니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무너져 내리고는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파하는 날 보며 더 힘들어할 그가 잘 버텨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고. 그래서 견뎠다. 죽을힘을 다해. 

 그러던 어느 날 내 속에서 뭔가가 문득 툭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끝에 내가 그의 곁에 있는 것이 그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별을 넌지시 내비쳤다. 덤덤한 척하고 있었지만 하얗게 질려가던 그의 얼굴을 보았다. 제어할 수 없이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와 사시나무 떨듯 떨던 그의 손을 보았다.

차마 나를 붙들지 못한 채 혀를 깨물며 눈물을 삼키고 있던 그를 보며 생각했다. 사랑이 구실이 되어 그를 떠나는 일은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슬픔과 고통으로 내 목숨이 짧아진다 해도 사랑이 변치 않는 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곁을 지켜야겠다고. 그리고는 내내 아팠다. 아파도 칭얼거릴 수 없었다. 그 아픔까지 사랑이라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기에 그가 강한 만큼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힘들다거나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거나 변함없이 곁에 머물러 달라는 말을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부류의 사람. 그 말 대신 냉정하고 뾰족한 말을 뱉어 두고는 그게 마음에 걸려 밤새워 뒤척이며 울고 있을 부류의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닌 척, 괜찮은 척하는 것조차 서툴러 결국에는 들켜버리고 마는 그에게 속아주는 척을 했다. 두려움과 불안이 커질수록 그렇지 않은 척하는 그의 언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척했다. 그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사이 그는 안정을 되찾아갔고 나는 나를 잃어갔다. 몇 달 만에 만난 친구가 깡말라 버린 나를 보며 제발 너를 좀 먼저 보라고 했다. 그 말뜻을 알지 못해 멍해졌다. 힘들기는 하지만 나도 챙기고 있어,라고 했다. 친구는 지긋이 나와 눈을 맞추더니 걱정스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는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다. 

 그가 아닌 그를 사랑하는 내가 가여워 울게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내 눈을 보면서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아픔이 더 깊고 아프게 느껴져 내가 나의 아픔에는 무감각해져 있었다는 것을. 그 사람만 괜찮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내 마음이 문드러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갖은 시나리오를 만들어 두고 있었다. 바보같이 말이다. 

여리고 순수한 사람,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진 말을 하지 못해 홀로 아픔을 짊어져 버리는 사람. 나를 이토록 힘들고 괴롭게 할 수밖에 없는 사정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홀로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사람. 그러했기에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려 설 수 없었다. 돌아서려 하면 그의 아픔이 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을 지나서야 본다. 내 온몸이 가시투성이가 되어 있다는 것을. 가시 박힌 곳에서 내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 눈물이 바다에 이르러 슬픔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는 것을.

등을 돌려서 보기로 했다. ‘이렇게 머뭇거리는 것은 서로에게 아픔밖에 되지 않는다, 그를 위해 뒤돌아서야 한다. 돌아선 후에는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라며 말이다. 돌아는 섰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의 파도 소리가 발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미어지는 가슴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나더러 어쩌라고 하며 소리 높여 외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시 등을 돌려 바다를 끌어안은 채 울며 외쳤다. 

 “사랑해서 미안해, 놓지 못해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미안하게 해서 미안해.”라고.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파도가 밀려왔다. 파도에 손을 덧댔다. 그가 전하지 못했던 말이 가슴에 닿았다. 소리 없는 말속에 담긴 눈물이 상처에 스며들었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돋아난 살에서 그의 향이 번져왔다. 번지는 향이 바다 위 햇살의 속삭임을 들려주었다. 새 살 위로 그가 내내 외치고 있던 말이 새겨졌다.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널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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