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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화자 Sep 16. 2021

글 쓰는 할머니의 이야기 45

나의기차여행 시절

나의 기차여행 시절


매원. 신화자



  나의 경춘선 기차여행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때가 많았다. 두 시간 남짓 기차가 달리는 동안 차창 밖에는 계절이 바뀌고 강물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갔다. 흰 눈이 희끗희끗 남아있던 산골짜기에 잔설이 녹고 나무들은 초록색이 짙어진다 싶으면 꽃이 피었고 그 며칠 후에 기차를 타면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떨어져 버렸다. 논에 모를 냈구나... 그러자 곧 여름이었다. 또 얼마 후 기찻길 옆 산에 단풍이 들면 가을이었다. 그렇게 기차여행을 몇 번쯤 하면 달이 바뀌고 또 해가 바뀌었다. 지나간 이십여 년 전 일들이 까마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물처럼 흘러가 버렸다.


  요즘은 철도 서비스도 많이 좋아졌다. 속도는 빨라졌고 서비스도 좋아졌다. 전기 전자 시스템으로 자동화된 운영체계가 편리해졌다. 역 대합실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언젠가 그 시절, 역 대합실 게시판에는 철도 여행의 좋은 점을 적어 보라는 주문에 답을 한 것이 붙어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에 심심 풀이었을 것이다. 

<좌석이 있어서 좋다. 화장실이 있어서 좋다. 기차표가 있어서 좋다. 시간표가 있어서 좋다. 기차는 철길로만 다녀서 좋다. 추억이 있고 낭만이 있어서 좋다. 안전해서 좋다.> 등등 재미있는 내용들이 쓰여 있었다. <대합실에는 떠나는 사람들과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사람들과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은 곳>이라고 기다란 문구를 써넣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그 시절에 남편이 있는 집을 떠나서 기차를 타는 나의 여행가방 안에는 자취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손수 농사를 지어서 씻어 널어 말렸다가 기름집에서 갓 짜낸 들기름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와 밑반찬이나 김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고춧가루와 계절 따라 텃밭에서 자란 달래, 풋고추, 호박 한 두 개까지도 싱싱함으로는 서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므로, 나의 여행가방 안에는 시골스러운 것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성업 중인 택배가 그때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편리했을까. 꿈처럼 멀어진 나의 청춘이 안타깝다. 


  나의 여행은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이루어질 때가 많았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자식들에게 전화를 한다. 음성만 들어도 몸살감기에 신열이 있음을 알아차릴 때, 직장 살이에 힘겨워 지쳤을 때, 외로움을 탈 때,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나는 알아차린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내 새끼들.

"아이들한테 갈 때는 신명이 나서 눈빛이 달라진다." 고 남편은 말했다. 그러나 나의 서울살이는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불현듯 흰머리가 많아진 남편이 혼자 있는 것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고 집 안팎 구석구석 일상의 모든 일들이 불안함으로 다가와서 성급히 가방을 챙겨 들고는 아이들이 자고 있는 새벽녘에 메모 한 장을 식탁 위에 얹어놓고 서둘러 허둥지둥 새벽기차를 탄다. 이른 아침 동이 트고 있는 새벽 기차 안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통일호 새벽기차에는 부지런한 여인들이 타고 있었다. 밤 새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뒤져서 물건을 골라 사 가지고 내려가는 지방의 상인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보퉁이를 베고 끌어안고 빈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식들의 교육비를 마련하느라 고단한 삶을 꾸려가는 것이리라. 

새벽기차는 달리고 나는 아이들로부터 멀어지는 만큼 남편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걸어서 십분 거리의 집과 직장 사이에 철길이 있었다. 농사일이 바쁘시던 시부모님과 갓 태어나 보살핌을 주어야 하는 갓난아기와 남편, 아기를 돌보기로 한 남의 식구까지도 모두 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부담이라고 생각했었다. 철길을 중간에 두고 출퇴근하면서 집 쪽의 오 분은 집의 일로, 철길을 건너 직장이 가까워지면 직장의 일로 집의 일을 잊은 채 하루 일을 마쳤고, 퇴근길에 철길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다시 집에 두고 온 아이와 집안일로 마음이 바빠지곤 했었다. 그때, 젊고 여린 새댁은 언제나 바쁘게 그렇게 허둥댔었다. 


  "엄마는 집에 가면 우릴 잊어버리는 것 같고 서울에 오면 아버지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 같다."라고 아이들은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와는 정 반대였던 것을 누구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로 대합실은 늘 북적거렸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을 마중하는 사람들 틈에 반가워하는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요즈음 나의 기차 여행은 그 시절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나간 시절의 일들은 모두 추억이 된다. 여행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일상을 떠나는 것이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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