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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남자 Mar 04. 2016

노구



노구는 고양이다. 사료를 꼬박꼬박 챙겨주긴 하지만, 키운다는 말은 왠지 적합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반려동물'이라고 할 정도의 물질적, 시간적인 애정을 쏟는가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기 때문. 그렇다고 밥만 주는 길냥이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최소한 그것보다는 높은 수준의 교감이 분명히 있어 왔기 때문이다.


노구가 우리 집에 온지는 5년이 넘었다. 동네 친구집 마당에서 키우던 암컷 고양이가 있었는데, 그 고양이가 낳은 새끼가 바로 노구다. 시골 마을이 으레 그렇듯 그 친구 집에는 작은 개도 키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개와의 마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였을 수도 있지만-, 그 고양이는 포터를 끌고 시골을 돌아다니는 개장수에게 팔릴 운명이었다. 새끼들까지 모두. 그 어린것이 불쌍해서, 라는 것은 솔직히 거짓말이다. 나는 그때 문득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었고, 그렇다고는 해도 방 안에서는 동물을 절대 키우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래, 저렇게 개장수에게 팔려가느니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더 낫겠지'하는 마음에 그 두마리의 새끼들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이를테면 뭔가 좀 더 가벼운 책임감을 가져도 된다는 마음이었다고 할까. '내가 안 데려가면 쟤네는 식용으로 팔릴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될 바에는 어떻게든 키우는 게 쟤네한테도 낫지 않나?' 뭐 이런 마음이었달까.


데리고 온 새끼는 암, 수 한쌍이었다. 암컷은 얼룩덜룩한 삼색 무늬를 가지고 있어서 '삼색이'라 불렀고, 수컷은 노란 무늬라 '노구'라 불렀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노구 할배 이름을 딴 것 또한 맞다. '삼색이'는 애교가 많고 금방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노구'는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나를 경계하고 하악질을 해댔다. 동물의 심리 같은걸 이해하려 노력할 정도로 섬세하지는 않은 나였기에, '왜 내가 밥 챙겨줘 잠자리 챙겨줘가며 얘한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하는 생각에, 화가 나서 어디 몰래 내다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물론 생각만 했다).


고양이는 집을 잘 나가버리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삼색이와 노구에게 내가 주인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위협이 되는 존재는 아니다 라는걸 각인시키기까지는 작은 케이지에 가둬서 키웠었다. 그 후에는 풀어놓고 자유롭게 키웠는데, 2년이 지났을까. 삼색이는 어느 날부터 돌아오지 않았다. 그 2년 동안 삼색이는 몇 번의 출산을 했었고, 대부분은 분양을 시켰지만 내가 키운 새끼들도 여럿 되었다. 하지만 끝내 다들 집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여태까지 남은 고양이는 노구 하나뿐이다. 녀석은 살갑진 않지만, 하루 종일 동네를 쏘다니다가 밤늦게 내가 집으로 들어오면 용하게 알고선 내방 창문 앞에서 울어재끼곤 했다. 야옹, 하고선 내 반응을 기다린다. 한참을 가만있어본 적도 있다. 내가 혓바닥으로 '쭛!' 하는 소리를 내면 다시 '야옹'하며 대답해주곤 했다. 밥을 주러 나가면 굵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총총 따라오는 모습이 흐뭇했다.


작년에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면서, 시골집에 오지 않는 날이 꽤 있었다. 아마도 노구는 나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집에 오면 항상 노구의 밥그릇을 채워주고, 다음날에 빈 것을 확인했지만 막상 녀석의 모습을 못 본지가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 '다른 암컷을 만나 집안을 꾸렸나 보다' 라는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어디서 죽은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시골 마을이라 로드킬을 당할 만큼 차가 많지는 않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마치 야생동물과도 같은 시골의 길고양이들에게 해를 당했을 가능성 또한. 도시의 길고양이도 마찬가지이지만, 집 나간 고양이가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노구가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해가 져서 집에 돌아온 꼬마애처럼, 내 방 창문 아래에서 '야옹'하고 울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 죽어있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내가 묻어 줄 수는 있게 말이다. 솔직히,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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