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1.
그룹 피티를 받고 있다. 어제까지 총 여섯 번 나갔는데, 아주 만족스럽다. 우선 체육관이 독립문 공원 맞은편에 자리 잡아 뷰가 멋지고 코치들의 지도 방식도 괜찮다. 로잉 머신을 비롯한 이런저런 기구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도 흡족 포인트. 가격도 매우 저렴한 편이다. 무엇보다 평소에 전혀 쓰지 않는 근육을 인지하고, 단련하는 쾌감이 대단하다. 피티를 받은 다음 날엔 언제나 새로운 종류의 근육통을 경험하는데 이마저도 달갑다. 몸 구석구석이 건강해짐과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기분이다. 보디빌더들이 왜 보디빌딩에 빠지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오버일까? 아픈 게 당연한 거예요. 트레이너의 이 말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운동이 그간 사용하지 않았거나 소홀히 또는 함부로 대해 약해진 부위들에 자극을 주고, 나아가 전신을 지탱하는 핵심을 건드리는 작업이니 아픈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다 보면 어느새 나아질 거라고, 그건 아주 뿌듯할 거라는 말에도 힘을 얻었다. 마치 주문과도 같아서, 이제는 피티를 받고 어딘가 아프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기도 하다. 물론 트레이너는 무리하는 게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조언도 덧붙이지만. 어제 오전에도 충분한 아픔을 느꼈다. 따릉이를 타고 귀가하면서 아픈 게 당연한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올렸다. 먼저 글쓰기의 아픔. 이토록 하찮은 일기를 쓰면서도 늘 고통스러운데, 당연한 이치다. 기억하고 기록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흘러갈 것들을 부러 붙잡는 작업이고, 단어들을 파헤치고 조립하는 일인 까닭이다. 드물게 찾아오는 성취감도 역시. 곰곰 생각해 보면 세상의 거의 전부가 이에 해당하는 듯하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감각하고 아파함의 연속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화 <소울>을 보면서 피티를 받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일 테다. 내가 방치했고 소홀해 약해진 생의 감각들을 일깨우는 그런, 더없이 훌륭한 트레이너가 바로 <소울>이어서다. 그간 소홀했던 일기를 다시 쓰게 된 것도 영화 덕분이다. 가을 햇살 아래 떨어지는 나뭇잎을 붙잡는 순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순간. 일견 사소하고 끝내 그리울 그런 순간들을 조금이라도 오래도록 느끼고,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싶은, 불꽃을 일으켜주었다고나 할까. 오늘 아침 집을 나서는 데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누나와 큰 조카였다. 커피를 사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버스정류장까지 동행했다. 작별을 나누고, 토끼 모자를 눌러 쓰고 리듬을 타듯 걷는 아이와 그 손을 꼭 잡은 엄마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눈부셨던 그 장면을 상기하니 미소가 지어지면서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건, 내가 살아있어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