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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성 Apr 21. 2021

USS Liberty(AGTR-5)

역사에 남은 선박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등을 지고 원수같은 사이라고 하더라도 한 순간에 같은 편이 되는가하면 혈맹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어도 국익이 따라 한 순간에 원수처럼 변하기도 한다. 이처럼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로 얽혀있는 것이 국제관계고 국익의 문제겠지만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사이좋게 지내던 우방의 등에 칼을 꽂은, 그리고 그렇게 칼에 맞은 국가가 오히려 '국익'에 따라 침묵을 지킨 이상한 일도 있었다. 


자국의 군인들과 요원들이 어이없이 죽어나갔고 범인이 누구인지도 애초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관련 이슈를 모두 1급기밀로 묶어버리고 침묵을 지켰던 이상한 사건의 피해자였던 USS Liberty함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군함 외에도 수많은 전시표준수송선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물자들을 수송하고, 병력을 수송하는 것에 특화시켰던 이 선박 규격 중 대표적인 것이 리버티선과 빅토리선으로 리버티선의 경우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모두 2,751척을 건조했고 그보다 조금 더 크고 약간의 무장도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던 빅토리선의 경우 총 531척이 건조되었다. 


전시표준선들은 워낙 빠른 시간에 효율성만을 강조해서 지어진 탓에 많은 멀쩡히 운항 중 피로파괴를 일으키는 등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워낙 많은 수의 배들이 건조되다보니 전쟁이 끝나고도 상선, 군용수송선으로 전용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빅토리급의 경우, 애초 리버티급의 문제점들을 대폭 개선하여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렇게 탄생한 빅토리급의 전시표준선 중 가장 잘 알려져있는 것이 6.25 당시 흥남철수작전 때 수많은 피난민들을 태우고 내려왔던 메러디스 빅토리였다. 

SS Meredith Victory

빅토리급 전시표준선들은 재화중량(DWT) 10,600톤에 전장 138.7m, 선폭 18.9m 최고속도 17노트로 찍어낸 배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틀을 가지고 있었고 유조선, 일반화물선, 인원 운반선 등 여러가지 용도의 선박으로 개조하는 것도 용이했기 때문에 전쟁 내내,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러가지 용도의 선박으로 사용된다. USS Liberty함도 바로 이 타입의 수송선이었던 SS Simmons Victory를 개조해서 미해군이 사용했던 정보수집함이었다. 


SS Simmons Victory는 1945년 2월 23일,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6개월 전 건조된 빅토리급의 수송선으로 잠시 전쟁 중 군수송선으로 쓰이다 종전후 상선으로 그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미해군이 다시 인수하여 개장후 1964년 12월, USS Liberty(AGTR-5)라는 이름으로 변경후, 재복무를 시작하게 된다.

USS Liberty(AGTR-5)

AGTR은 Auxiliary Technical Research Ship의 약자로 우리 말로는 보조기술선박 정도로 해석되지만 첨단장비들을 장비하고 주변의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역할을 맡은 첩보함을 뜻하는 말이었다. 북한에 나포되었던 USS Pueblo(AGER-2)에서의 AGER도 Auxiliary Environmental Research ship의 약자로 환경조사선이라는 이상한(?) 명목을 가지고 있지만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선박이었고 그보다 훨씬 대형선이었던 USS 리버티의 경우 당시로써는 최첨단 장비로 도배하다시피했던 정보수집/분석함이었다. 

USS Liberty의 함장 William Loren McGonagle 대령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항공기를 동원, 이집트를 전격적으로 공습하며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훗날, 6일전쟁으로 불리웠던 이 전쟁에서 하루도 채 지나기 전에 이집트 공군의 대부분 전력이 무력화되었고 아울러 진격을 시작한 이스라엘 육군에게 수에즈 운하까지 뚫리며 육상병력도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요르단이 이스라엘에 맞서 선전을 펼쳤지만 이미 제공권을 장악당한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뒤늦게 전쟁에 뛰어든 시리아군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이스라엘군에게 박살난 상황. 


이렇게 전황 자체가 이스라엘의 승리로 굳어져가고 있던 6월 8일 오후, 조용히 우방의 승리를 지켜보고 있던 미해군 제6함대에 난데없이 정보수집함 USS리버티로부터 불상의 적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는 구난신호가 날아든다. 

프랑스 Nord Aviation사의 Noratlas 쌍발수송기

전쟁이 시작되기 며칠전이었던 1967년 5월 23일, USS 리버티는 당시까지는 이집트의 영토였던 시나이반도 부근 공해상에서 신호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중해 동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동 중 전쟁이 발발하며 그에 따라 이집트와 이스라엘 영해에서 일정부분 거리를 둔 공해상에서 임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운명의 날이었던 6월 8일, 가장 먼저 이스라엘 공군의 수송기였던 프랑스제 Nord Noratlas가 배 주변을 저공비행하고 지나갔는데 이때까지만해도 그 어떤 징조도 없는 상황이었고 근무교대를 한 선원들이 갑판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오를 넘어 오후 2시로 달려가고 있던 순간 2기의 전폭기가 갑작스러운 공격을 가해왔다.

리버티호를 공격 중인 닷소사의 Super Mystere 전폭기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접경지 공해상에서 난데없이 항공공격을 받는 동안, 지중해함대로 이 상황을 알리기 위해 열었던 통신회선은 모조리 전파방해를 받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고도의 훈련이 되어있던 리버티함의 통신장교는 기어이 방해를 뚫고 지중해함대인 6함대로 자신들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사리 알렸다. 다만, 평소 비문으로 보내던 전문을 평문으로 보낼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전쟁 초반에 이집트 공군이 전멸했음을 알고있던 상황의 리버티호 승무원들은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적들의 정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리버티를 공격해온 폭격기의 정체는 프랑스제 Dassault Mirage III와 Super Mystère였고 프랑스를 제외하고 주변에서 이 항공기를 운용하던 나라는 이스라엘 밖에 없었던 것. 


난데없는 우방국의 공격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항공기의 공격에 이어 고속정들의 어뢰공격이 가해져왔고 한 발의 어뢰가 선체 우현 앞부분에 명중한 것. 

갑판에 화재가 발생한 상황에서 회피기동 중인 USS Liberty

이 어뢰로 인해 한 번에 승조원 25명이 사망하는 대피해를 입게 된다. 공격해오는 적들의 정체가 이스라엘임을 알고 대형 성조기를 흔들며 자신들이 미국선박임을 알렸음에도 치명적 공격이 이어진다. 항공기의 기관포 세례에 네이팜탄 공격, 고속정으로부터 어뢰공격까지 받은 상태에서 상갑판에는 화재가 발생했고 어뢰로 인해 해수가 배안으로 밀려드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함장 William Loren McGonagle 대령 이하 승조원들은 필사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고 침수를 막으며 회피기동까지 벌이는 악전고투를 벌여야했다. 

미국방장관 Robert McNamara

이 사이 리버티로부터 구조신호를 받은 6함대의 항공모함 USS Saratoga(CV-60)는 4대의 F4B전폭기를 신호발신 위치로 발진시켰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당시 공격을 받은 리버티호의 승조원들도 자신들을 적으로 오인한 이스라엘의 오폭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조난신호를 수신한 항모측에서도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처를 한 것이었지만 같은 6함대 소속항모였던 USS America (CVA/CV-66)에서 출격하여 합류하기로 했던 항공기들은 출격조차 하지않은 것. 


거기에 사라토가에서 항공기가 출격해서 리버티함으로 향하고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방장관 Robert McNamara는 급히 해군참모총장 David L. McDonald 제독에게 당장 출격한 항공기를 귀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 고작 15분거리에서 공격당하고 있는 아군 함정을 그저 지켜만보고 있게된 해군 측은 그저 멍한 상황. 그 사이 구원을 기다리던 리버티함은 한 시간여를 무방비로 두들겨 맞으면서 그저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구축함 USS Davis(DD-937)

항공기들과 고속정들이 물러나고 한 시간여가 흐른 뒤, 한 척의 이스라엘 고속정이 다가와서 도움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해왔을 때, 리버티함의 함장이었던 William Loren McGonagle 대령은 쌍욕으로 응수했고 이어서 인근해상에서 역시 상황을 엿보고있던 소련의 순양함 한 척도 뒤늦게 도움을 주겠다고 다가왔지만 마찬가지로 자력항해를 고집하며 돌려보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외부의 도움이 간절한 상황이었지만 임무 자체가 기밀인 정보수집함의 특성상 타국의 군대에게 도움을 받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던 것. 결국 피격후 한 나절이 지나서야 USS Davis(DD-937)가 현장에 도착하며 간절히 기다리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피격당한 흔적을 바라보는 William L. McGonagle 함장

이후 집계된 피해상황은 그야말로 처참한 것이었다. 290명의 승조원 중 34명이 사망했고 174명이 크고 작은 부상은 입은 것. 자신들이 미국 국적선임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이스라엘군은 아예 격침을 목적으로 달려들었음이 분명한 상황. 이해할 수 없는 공격에 당연히 여론이 들끓어야 정상이었겠지만 여기에서도 석연치않은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국방성의 지시에 따라 전승조원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 어찌되었건 사건에 대한 조사는 필요했고 국방성은 사건 조사위원회를 꾸리고 Isaac C. Kidd Jr. 해군소장을 위원장으로 임명한 후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리버티함 피격사건 조사위원장 Isaac C. Kidd Jr. 해군소장

사건 3주만에 700쪽이 넘는 보고서가 채택되었고 그 내용은 이스라엘이 리버티함을 적대국 이집트의 군함으로 확신하며 사건이 시작되었으며 이어진 모든 것이 결국 오해가 부른 우연의 산물이었다는 것. 


하지만, 위원회는 직접 리버티함의 승조원들을 조사한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의도적으로 보고서에서 누락시키거나 축소시켰고 이스라엘 공격부대의 교신 내용을 증거로 채택하지도 않는 등 보고서 자체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투성이였다. 해군법무관실에서 이 보고서에 대한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채택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냈지만 당시 미해군 유럽/아프리카 지역사령관이었던 John S. McCain Jr. 중장은 보고서 채택을 강행하는 무리수를 둔다.

미해군 유럽/아프리카 지역(CNE-CNA)사령관 John S. McCain Jr. 해군중장

애초 조사과정에서 조사위원회를 이끌어던 키드 소장이나 사령관 멕케인 중장도 이스라엘이 리버티호가 미군선박임을 알고있었다는 증거를 통해 사실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부실한 보고서를 채택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 


처음 리버티호의 부상자들이 후송되었던 키티호크급 항공모함 USS America(CVA/CV-66)에 중동전을 취재하기 위해 파견나와있던 기자들이 리버티호 승무원들과 접촉하는 것도 막은 상태에서 이미 석연치않은 부분들을 많은 이들이 깨닫고 있었고 그에따라 군수뇌부들이 무엇인가를 숨기려한다는 사실만 점점 더 확연해지고 있었다.

사고현장에 도착한 USS America 함상에서 바라본 USS 리버티함

당시 미해군조사위원회(Naval Board of Inquiry)소속으로 리버티함 공격사건의 조사에 참여했던 Ward Boston, Jr. 해군대령은 이 사건 자체가 우발적인 도발이 아니라 이스라엘 측의 의도적인 공격이었고 이 사실을 조사과정에서 이미 위원장이었던 키드 소장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자료들을 의도적으로 보고서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그 배후에 군수뇌부들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 애초 조사위원회와 더불어 조사에 나섰던 JAG(미해군 법무관실 : Judge Advocate General of the U.S. Navy)에서 조사위원회의 보고서 내용과 완전히 다른 보고서를 해군본부에 올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는데 그 내용은 공격내내 고의적인 통신방해(Jamming)가 있었으며, 15분간 짧은 공격이 이어졌다는 이스라엘 측의 해명과 달리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공격이 이루어졌고, 그 공격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이 8차례에 걸쳐 정찰기를 보내 면밀히 리버티함을 근접정찰한 바 있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게 된다. 이스라엘 측의 해명처럼 이집트 군함으로 오인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적시되어 있던 것. 거기에 해군 수뇌부는 이 내용을 기밀로 분류해서 외부로 공개되는 것을 막았고 실제 리버티함의 승조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는 것까지 드러난 것.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고의적으로 미해군의 함정임을 알면서도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고 그 내용을 미정부는 알면서도 은폐했다는 사실이었다.

Moshe Dayan 이스라엘 국방부장관

사건이 있은지 10년 뒤인 1977년, 기밀로 묶여있던 이 사건에 대한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 : 미중앙정보국), NSA(National Security Agency : 미국가안보국), ONI(Ofiice of Naval Intelligence : 미해군정보국)의 통합보고서가 해금되면서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부장관이었던 Moshe Dayan의 지시에 따라 리버티함에 대한 공격이 지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리버티함에 남은 상흔

이스라엘이 우방국 미국의 함정을 고의로 공격했고 그 사실을 미국은 알면서도 은폐했다는 사실은 드러났지만 여전히 왜 그런 무리수를 감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당시 리버티호를 격침시키고 이집트의 소행으로 꾸며서 미국의 여론을 환기시키려했다는 설과 리버티함의 활동 범위 안에 있던 이스라엘군 공항에서 벌어진 전쟁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공격했다는 설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배경은 미궁 속에 빠져있는 것.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분명히 이스라엘측의 고의에 의해 34명의 인원이 목숨을 잃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미국은 왜 그 사실을 대충 덮고 넘어가려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사건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은 운명공동체라 불리울 만큼 밀월관계를 이어가게 되고 이스라엘이 미국의 국방산업을 먹여 살려주는 가장 큰 고객으로 자리잡게 되는 불편한 사실이 이어지며 사건은폐 뒤의 씁쓸함만 남기게 된다. 

  

하지만, 사건을 두루뭉실 넘겨버린 댓가를 미국은 엉뚱한 곳에서 치르게 되는데 리버티함에 대한 공격이 있은지 불과 7개월여 후인 1968년 1월 21일, 푸에블로함이 북한에 의해 나포당하고, 1969년 4월 15일에는 조기경보기 EC-121가 역시 북한에 격추당하는 대참사를 겪게된 것. 당연히 강력한 후속대책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상태에서도 미국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오히려 북한이 원하던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기관포에 난사당한 함장실에서의 함장 William L. McGonagle 대령

한편,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배를 지키며 공격을 견뎌냈던 리버티함에게는 해군 부대표창이, 함장 William Loren McGonagle 대령에게는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수여되었지만 통상 백악관에서 대통령의 손에 의해 주어지던 관행에서 벗어나 비밀리에 해군장관이 수여하는 웃지못할 해프닝까지 벌어지게 된다. 


USS Liberty는 사건조사를 마치고 1968년 6월 1일자로 해군함정에서 제적되었고 1970년 12월 17일, 일반 매각후 고철로 처리되며 함생을 마치게 된다.

사건 후 1967년 6월 17일, 몰타의 발레타항에 입항 중인 USS Lib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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